"제대로 밝혀진 게 없는데 세월호 왜 잊으라고 하나"

[밖에서 본 기자, 밖에서 본 언론](3)세월호 참사로 아들 민성이 잃은 김홍열씨

“상처만 남은 1년, 달라지겠다던 약속 지켜달라”

“민성이와 많이 놀러왔던 곳인데….” 민성 아빠 김홍열씨는 화랑유원지를 두리번거렸다. “롤러장도 있어요. 여긴 공연장이고, 저쪽에 매점도 있고….” 어린 민성이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놀았던 기억이 살아나는 듯 아빠의 눈동자는 조금씩 흔들렸다.


단원고 2학년 학생 김민성군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3박4일간의 제주도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했던 민성이와 친구들은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영정 사진으로만 남았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11달 남짓 살아왔을 뿐인데 잔인했던 봄날은 참담한 기억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돈 잘 버는 아빠가 아니었고, 해달라는 거 다 못해준 아빠라는 회한과 죄책감이 가슴에 응어리졌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합동분향소 한쪽에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유가족 대기실. 민성 아빠는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었다. 취재진이 건넨 명함을 앞뒤로 펼쳐보며 희미하게 웃었을 뿐 좀처럼 말이 없었다. 


이날 유가족 대기실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취임 후 처음으로 합동분향소를 방문한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이 유가족과 면담을 하기로 한 까닭이었다. 유족들은 유 장관에게 참사 1주기에 앞서 정부가 세월호 선체 인양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다. 


김홍열씨는 세월호 사고 이후 자신을 ‘김홍열’ 보다는 ‘민성 아빠’라고 부른다.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생때같은 아들이 차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버둥거리다가 갔는데 먹고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게 미안했다.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요. 1년이 되도록 밝혀진 게 없으니 나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아이를 만나면 덜 미안할 것 같아요.” 


민성 아빠는 세월호를 알리기 위해 지역 간담회에 가고,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콘서트 현장을 찾고, 분향소에 잦은 발걸음을 한다. 정부가, 다수의 언론이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침묵하면서 잊으라고만 하고 있어서다. 받지도 않은 보상금을 유족들이 받았고, 보상금 때문에 유족들이 거짓말한다는 말을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세월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유족들의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시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유족들에게 힘을 내라는 시민들이 많습니다.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너무 고맙죠.”



유가족 향한 왜곡된 시선
언론 통해 여전히 확대·재생산


안산분향소 하루 100여명 조문
시민들 지지·격려에 큰 힘 


잊혀짐에 대한 서운함보다
잘못된 사회구조 변화가 우선


그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막막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공론화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 자식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뒤편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민성아빠 김홍열씨가 이내 장관을 향해 따져 물었다. 슬픔과 답답함이 뒤섞인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세월호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은 세월호의 완전한 인양을 촉구했지만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의 답변은 “공론화 과정을 거치겠다”는 원론적 수준에 그쳤다. 유가족들은 정부가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실종자 수습과 진실규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첫째도, 둘째도, ‘인양’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실종자 수습은 물론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요.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지난해 4월15일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2학년5반 민성이는 사고 13일 만인 29일 뭍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착하고 든든했던 아들. 키도 크고 운동실력도 뛰어났던 민성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직업군인이 되어 “아빠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하곤 했다. 또래에 비해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민성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김씨는 민성이가 길에서 교통카드를 주웠던 일을 떠올렸다. 1만2000원이 남아 있던 카드의 주인을 알 길이 없어 “그냥 놔두느니 쓰면 어떨까” 건넨 한 마디에 민성이는 정색하며 화를 냈다. “내 것이 아닌데 왜 사용하느냐”는 거였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그 카드는 아직도 집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가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말했다. 민성이는 아내의 꿈속에 자주 나타났다. 아내는 꿈에서나마 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줬다. 하루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하루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한참을 놀다 갔다. ‘엄마, 나 왔어. 학교 가야하는데 교복이 없어.’ 민성이는 말했다. “왜 교복이 없었겠어요. 다 태웠으니까요….” 아빠는 목이 메었다.

진실 외면하는 언론에 또 한번 상처
“언론이 처음부터 사실대로만 방송해줬어도 이렇게까지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국 국민들이 보고 믿는 것은 언론이니까요.”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언론에도 많은 숙제를 던졌다. 시작은 사고 당일 전원구조 오보였다. 지상파방송, 보도전문채널들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에 전원구조 오보를 내보내 구조 활동을 지연시켰다. 이후에도 정부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받아쓰며 수백 명의 인력이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를 포함한 유가족들이 바지선 위에서 바라본 현장과는 괴리가 큰 보도였다. 급기야 방송사 간부들의 잇단 망언도 터져 나왔다. 유가족들은 KBS 사옥과 청와대를 항의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KBS 막내급 기자들은 “우리는 기레기(기자+쓰레기)로 전락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공영방송 사장과 보도국장은 옷을 벗었다.


사고 초반, 극에 달했던 언론에 대한 반감과 불신은 이제 체념으로 바뀌었다. 평생 직장생활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탓에 정치도, 언론도 잘 몰랐던 김씨는 “언론이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오롯이 실감했다. 유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서울 농성장에서 기자들을 만나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외신이나 대안언론에 의지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김씨는 참담한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앞두고 유가족들은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경찰의 통제에도 유가족들은 ‘살려 달라’ 소리쳤다. 의자와 박스 위에 올라가 제 몸집만한 피켓도 흔들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게다가 방송에서는 믿기 힘든 앵커 멘트가 흘러나왔다. “대통령이 국회에 들어갈 때 경찰 방어막에 가려서 유가족들을 못 봤을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절규하고, 의자 위에도 올라갔는데요…. 방송사 앵커가 그런 발언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죠.”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언론’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방송과 지면을 통해 반성하겠노라, 달라지겠노라 말했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앞에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기자로서의 회의감에 눈물도 흘렸다. 이후 1년. 무엇이 달라졌을까. 


“언론이 달라지겠다고 했는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유가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언론은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보상금을 받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그는 MBC 보도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아야 했다. MBC는 지난 1월6일 ‘뉴스데스크’에서 정부가 국민성금을 통해 희생자 1명당 7억~8억원을 보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동안 가족들이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유가족을 향한 왜곡된 시선은 언론을 통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김씨는 반문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가족 모두에게 ‘후회’라는 멍에만 남아
지난 1년 동안 민성이 가족에게 남은 것은 ‘후회’라는 멍에였다.
어렵게 말문을 연 김씨는 민성이가 수학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직감일까. 그는 아내에게 민성이를 수학여행에 보내지 말자고 했었다. 투덜거리긴 하겠지만 부모 말을 거역할 아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는 반대했다. 수학여행에 들뜬 아이를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설득하지 못한 아빠도, 아빠의 말을 막아선 엄마도, 평생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사고 전날 밤도 “민성이와 통화하고 싶다”는 아내를 말렸었다. 한창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을 텐데 내일 오전에 걸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아들 목소리를 영원히 듣지 못할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팽목항 시신검안소에서 만난 민성이의 얼굴을 아내에게는 차마 보여줄 수 없었다. 아무렴 내 자식이고 부모인데 못 알아볼까 싶었지만,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아내의 충격이 걱정돼 입관 직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민성이와 두 살 터울의 누나도 “내가 단원고에 가지 않았다면 민성이도 단원고에 따라 오지 않았을 거고, 그럼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슴을 쳤다.


김씨는 민성이의 시신을 확인한 다음날인 4월30일, 직장에서 퇴직 처리됐다. 5월 한 달 동안 무급 휴가를 신청했지만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안산과 진도가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되면서 긴급생활지원비를 받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고, 실업급여 지급은 다음 달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우리 아이가 이유도 모른 채 갔는데 내가 먹고 살겠다고 하는 것도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인 것 같아요.”


그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희생자·실종자·생존자)들의 모임인 4·16가족협의회에서 간담회와 북콘서트 등에 간간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달 도보행진에서도 광주부터 나주까지, 진도에서 팽목항까지 걸었다. 특히 광주 송정리역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성원해준 기억을 김씨는 잊지 못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민성이의 사연은 한겨레신문 ‘잊지 않겠습니다’ 연재를 통해 소개됐다. 100번째 편지글이었다.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가 제안을 해왔다. “내가 민성이를 알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리고 민성이를 떠나서 세월호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 생각해 결국 승낙한 것이죠.” 한겨레는 그동안 신문에 실린 유가족들의 편지를 한 데 묶어 책을 펴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재는 한겨레 측이 유가족들로부터 양해를 구하는 과정에 있다고 김씨는 전했다. 


그는 한겨레 외에도 JTBC를 기억에 남는 언론으로 꼽았다. 유가족의 편을 들거나, 유가족의 입장을 대변해줬기 때문은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이들 언론사가 좋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저 유가족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상대적으로 많은 언론이 그러지 않으니까 고맙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어야”
작년 이맘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현실. 아픔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고통의 4월은 다시 유가족들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동안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특별조사위원회도 꾸려졌지만 “세금도둑, 탐욕의 결정체”라는 여당 의원의 공격과 미적지근한 정부의 태도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헤집고 있다. ‘이제 세월호 그만하자’는 부정적 여론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하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라며 “크게 생각하면 세월호 참사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지지와 격려도 여전하다. 안산분향소에는 여전히 하루 70~100명의 조문객들이 방문한다. 또 김씨는 지난 18일 거제시에서 열린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콘서트에서 큰 용기를 얻고 돌아왔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13명의 유가족을 인터뷰해 풀어낸 책이다.


“북콘서트에서 한 시민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세월호 인양에 대해 정부가 돈이 없다고 한다면 ‘먹을 것만 빼고 내 모든 걸 내놓겠다’고요. 국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는다고 해도 정부가 인양하지 않을 것인지 말이죠.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족들이 힘을 내야 한다, 가족들이 가만히 있으면 도와줄 명분이 없으니 힘을 내라고 하시더군요.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끝으로 취재진은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한참을 고민했다.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고 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기자와 언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그는 말끝을 흐렸다.
따스했던 햇살이 어느새 차가운 바람으로 양 볼을 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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