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기다림 끝에 이뤄진 인터뷰다. 4년 전 이맘때, 인터뷰 시도는 새 소설 집필 준비와 겹쳐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다 기회를 잡은 터라 빨리 뵙고 싶은 마음은 줄달음쳤다. 하지만 영동고속도로는 휴가철 차량으로 넘쳐났다. 아침부터 기다렸을 두 분을 생각하며 가슴을 졸여 달리길 5시간여, 마침내 강원도 평창의 한 리조트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지청구를 들을까 살짝 겁이 났다. 사실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때우고 있을 때 어디까지 왔냐는 전화를 한 차례 받은 터였다. 숨을 돌리고 있는데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가 부인 김초혜 시인과 함께 나왔다. 흰색 와이셔츠에 감색 재킷을 차려 입은 조정래 작가는 한복 차림의 사진 속 모습과 달랐다. 김초혜 시인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새하얀 들꽃 한 떨기를 건넸다.
부부는 8월 무더위를 피해 평창의 한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왜 평창을 오냐구요. 평창이라고 하면 ‘아 멀어서 못가겠네요’ 그럴 줄 알고 평창이라고 했더니….” 김초혜 시인은 웃으며 말했다. “해외만 아니면 어디든 뵈려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조정래 작가는 “허허”하고 웃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시작해 ‘아리랑’을 거쳐 ‘한강’을 쓴 20년의 세월을 ‘글감옥’이라고 표현한다. 그 세월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을 장가들게 했고, 그 자신을 할아버지로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처절하게 쓰느냐고 묻고 싶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지만 기자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한다는 동질감이 있고, 작품 속에 기자를 등장시킨 이유도 궁금했다. 지난 5일 오후 강원도 평창의 한 리조트에서 조 작가를 만났다.
“작가가 옳은 얘기하려고
작품 속에 기자를 등장시키죠
사회의 등불 역할에 비해
현실 속 기자들은 다르더군요”
해직언론인에게 복직메시지
한국일보 사태 때 사주 비판 칼럼
“언론은 사주 소유물 아냐
해직언론인 지치지 말고 싸우세요”
시대 문제점 지적 위해 기자 등장시켜
-‘태백산맥’과 ‘한강’에는 기자가 여러 사람 등장합니다. 특별히 기자를 소설 속에 등장시킨 이유가 있는지요?
“기자 본연의 임무는 사회의 등불 역할을 하는 것이죠. 비리를 고발하고 정의를 지키고 사회 모순을 밝혀내는 소중한 임무를 지녔어요. 민주주의가 현실화되기 어려운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내는 큰 역할을 하죠. 소설 속에서 작가가 옳은 얘기를 하고 싶을 때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기자예요. 그런데 그런 본질적인 임무에 비해서 현실은 과연 그런가. 이것이 기자들에게 주어진 숙제고, 인간 양심에 비추어서 얼마만큼 진정성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에요. 회의고….”
-의문을 느낀다는 말씀의 뜻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왜곡할 수 있는 게 분단 상황이죠. 거기에 맞춰 기자들은 작문을 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광고 때문에 편집국장이 암암리에 지시하는 압력에 써야할 불의를 덮거나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허수아비춤’에 나오잖아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자는 우리 시대 없어서는 안되는 감초와 같은 존재죠.”
‘태백산맥’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김범우가 선배 이학송 기자를 찾아와 기자가 되겠다고 하자 이학송은 이렇게 말한다. “기자생활이라는 게 거칠고, 고달프고, 무질서하고, 어떤 때는 소모적 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보람이나 만족이 없는 게 아니지만 그와 반대로 괴로움도 많소.”(태백산맥 5권, 241쪽)
-‘한강’에서 이상재 기자의 눈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의 실상을 증언했고, 포항제철과 그 건설자 박태준 회장을 조명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학송 기자의 시각으로 경찰 습격에 무너지고 있는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현장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기자적 시각이 필요한 내용이었는지요?
“작가는 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기자를 등장시켜요. 작가의 말이 아니고 기자를 통한 진실보도라는 기득권이 확보되죠. 그러면 독자들이 100% 믿어요. 신뢰성 확보, 주제 이동의 편리함, 진실성의 직접적 전달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기자를 등장시키죠. 그러나 잘못 쓰면 큰일 나죠. 기자들의 사명이 너무 크기 때문에요.”
-‘한강’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인 유일표가 해직기자인 이상재, 원병균과 함께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광주를 향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기자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죠. 그것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역사에 맡기는 짐은 누가 짊어져야 하나. 후배들이 짊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마감을 했죠. 그런데 30년이 지났는데도 후배들이 못 쓰더라고요. 역사의 시간이 지나 객관적으로 쓸 거리 확보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못 써요. 치열성의 부족인지, 게으름인지, 자신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또 쓰면 어떨까요.(웃음)
“4번은 못써요. 정말 난 늙었고, 4번까지 파도치는 바다로 느껴지는 그 곳에 뛰어들어갈 힘이 없어요. 그것은 후배들에게 맡겨야겠다고 작가의 말에 썼죠.”
-80~90년대는 참 치열했습니다. 소설에서 다룰 게 많을 것 같은데요.
“90년대는 관두고 80년대만 보더라도 그 시대가 얼마나 치열했습니까. 이걸 꿰뚫고 그대로 설정하면 소설 15권은 쓸 수 있어요. 고문장면, 가투장면, 군부독재를 타도하려고 하는 조직, 노동투쟁, 위장취업, 거기에 러브스토리도 하나 들어가고, 이렇게 되면 기가 막혀요. 조국 교수와 인터뷰할 때 내가 8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흥이 나가지고 막 이야기를 엮었더니 ‘선생님, 바로 그걸 쓰십시오. 쓰시면 됩니다’라고 하더군요.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데 그걸 언어화 시켜서 10권, 15권의 소설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막막히 혼자 터널 속으로 4번째 들어갈 자신이 없어요.”
고난이 올수록 채찍질 해야
-‘한강’에서는 1970년대 언론자유 투쟁을 벌인 기자들이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이후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취재하셨는지요?
“한겨레신문을 창간한 동아투위 핵심들이 다 내 친구예요. 권근술, 성유보, 임재경, 송건호 등 그 양반들이 내자동에서 출판사 할 때 자주 만났어요. 당시 내가 잡지를 하고 있었는데, 오가면서 보고 신문사에서 쫓겨났던 이야기를 듣곤 했죠. 그들이 쓴 격문을 읽어 봐주고 고치기도 하고…. 그분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생활고에 병들어 죽고, 구속되고, 그 수난은 말도 못해요. 그 서러움과 분노를 잘 알죠.”
‘한강’에서 해직기자 원병균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자신이 다니던 신문사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기자들을 내몰아버린 그곳은 이제 속 빈 강정이었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고 한 것은 기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최소한의 직분이었다. 그리고 신문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 다음이 사회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신문사는 그 기자들을 남김없이 몰아내 신문사이기를 포기해버렸다. 저건 이제 신문사가 아니라 신문사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겉껍데기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한강 8편, 237쪽)
-군사정권 때나 있었던 언론인 해직이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 해고된 YTN 기자 6명 중 3명은 7년이 넘도록 복귀하지 못했고, MBC에서는 8명의 언론인들이 쫓겨났습니다.
“MBC 해직사태 초기에 노조에서 연락이 왔어요. 해직기자 문제를 얘기해달라고 하더군요. MBC 부활은 해직기자 전원 복직이 없으면 안된다는 영상메시지를 보냈어요. MBC 부활은 MBC 죽었다는 소리잖아요. 그다음에 또 요청이 와서 재판부에 탄원서를 냈어요. 그런데 아직도 복직이 안됐어요? 정말 나쁜 경영진들이네요. 한국일보 사태 때도 사주 가문이 잘못했다는 걸 객관적으로 썼어요. 창업자 장기영 선생이 좋은 신문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어요. 언론이라는 중요한 기구를 사주 개인의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돼요. 결국 경영권 박탈당했잖아요.”
-대법원 판결을 받고 2년6개월 만에 복직한 이상호 기자에게 MBC가 정직 6개월이라는 재징계를 내렸습니다.
“이유가 뭐예요?”
-MBC 사측은 ‘대법원 취지는 해고보다 경한 징계가 적절한 것이지 징계사유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동료들이 그걸 바라보면서 뭘 생각하죠. 왜 가만히 있어요. 그 대목이 이해가 안돼요. 24시간, 48시간 시한부 투쟁에 돌입해 그것이 나쁘다는 걸 언론이 보도하게 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 침묵은 비겁이에요. 불의를 저질렀는데 침묵하는 것은 동조라고요. 국외자인 우리가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왜 동업자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해직 언론인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죠?
“지치지 말고 싸워야 해요. 경영진은 지치기를 바라면서 시간만 끄는 거죠.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를 말로 삼아서 끝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달려가는 노정이에요. 그 노정이 해직생활에 들어있는 것이에요. 고난이 올수록 더욱 강한 힘으로 자기를 채찍질해야죠. 지치면 안돼요.”
-45년째 작가생활을 하면서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기자가 있는지요?
“한국일보 기자 김훈씨가 기억에 남네요. 기사문을 기사답지 않게 호화로우면서도 예리한 감각을 가진 언어를 동원함으로써 문학평론을 능가하는 기사를 쓴 사람, 결국 소설가가 됐죠. 두 번째가 한겨레 최재봉 기자에요. 정확한 투시력을 가지고 작품을 해석하는 특이한 글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는 기자죠. 권근술 같은 기자는 굉장히 강직한 그야말로 외유내강이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죠. 심지가 굳고 뚝심이 강하고 문장 하나하나 정확하게 실어내는 기사를 쓰는 사람이죠. 칼럼니스트 고 정운영 교수도 있네요. 해박한 지식과 성실한 글쓰기를 통해 명문장으로 꼽히는 글을 쓴 사람이죠. 그 반대되는 기자들도 있죠. 역겨운 기자도 많아요.”
-선생님이 ‘태백산맥’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돼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당시 김훈 기자가 검사실 앞까지 동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검찰이 내 출두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김훈씨가 어떻게 그걸 알았어요. 검사실 앞에까지 저와 동행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으로 1994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해 2005년 5월에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만 11년 동안 수사를 받느라 ‘아리랑’과 ‘한강’ 연재가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했다.
-기자와 작가는 현장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취재를 많이 하고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시죠?
“기자는 육하원칙에 따라 현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죠. 그런데 작가는 현장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동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요. 그 차이만 있을 뿐이죠. 대하소설을 쓰려면 작품 무대가 될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 해요. 현장에 가면 지형지물이 보여요. 그 지형지물이 상상력을 촉발시켜서 이야기를 엮어내게 해요.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그것은 카메라 렌즈의 크기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두 눈은 180도를 봐요. 우리 두 눈이 가지고 있는 시야의 확보, 이것이 곧 전체를 조망하는 힘을 발휘하는 거죠.”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강한 소설을 주로 쓰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초등학교 때 국어와 역사 과목을 좋아했어요. 커가면서 왜 우리는 비참한 역사의 땅에 태어났을까 생각했어요. 대학생 때 올바른 작가의 길을 고민할 때 우리 민족의 슬프고 처절한 역사를 써야한다는 답이 왔어요. 그 이유는 민족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분단은 슬프고 괴롭고 불행한 우리의 현실을 왜곡해버려요. 남북 정권도 자기네 정권 유지를 위해 소모적 대결을 계속 획책하고 강화해 왔잖아요. 고심 끝에 ‘분단 극복’ 소설을 쓰자고 다짐한 이유에요.”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 재분단
진전된 남북관계 왜 뒤로 돌리나
친일파 청산 못한 건 민족적 비극
누가 어떻게 친일했는지 알아야
경쟁에 지친 사람들 감동시키려
하루 16시간 글쓰기
아내는 열독자이자 감독자
교육문제 다룰 차기작 준비 중
-광복 70주년은 역설적으로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우리 민족은 5000년 동안 931번의 크고 작은 외침을 당했어요. 이런 역사 경험을 절대 잊지 않고 정신적 무기로 가지고 있어야죠.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셨어요. 36년의 식민지 역사를 끝없이 상기하고 분노하고 다시 증오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해야죠. 그런데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우리 민족의 힘은 반토막 났잖아요. 김구 선생께서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김일성이라는 33세의 젊은 북한 지도자를 만나러 간 이유는 ‘분단은 식민지 시대보다 더 나쁘다. 식민지 시대에 민족은 분단되지 않았다. 함께 고통을 느꼈다. 이렇게 갈라져버리면 어떻게 되나.’ 그러지 말자고 가신 거죠. 갈라진 것을 이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이잖아요. 그러려면 두 개의 체제를 넘어서도록 진정을 다해 서로 양보하고 도와야죠.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처럼 진전된 남북관계를 한 발짝 발전시켜야 지혜롭죠. 완전히 깨부수고 그 전으로 돌려놨어요. 이런 퇴보가 어디 있어요. 재분단 시킨 거죠.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서 남북이 재분단 된거에요. 전임 정부가 통일의 노력을 10년 동안 했으면 이어받아야죠. 어떻게 깰 수 있습니까. 그래서 재분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에는 무려 12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그 많은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나요?
“나무에 매달린 수천 개의 나뭇잎은 닮아 있을 뿐이지, 다 달라요.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도 다 다르잖아요. 각기 다른 인물들의 미세한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에요. 평소에 모든 사물을 주시하고 살피고 그 다름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죠. 요령이 없어요. 당연히 이름도 달라야 해요. ‘태백산맥’에 나온 염상진과 하대치의 성(姓)은 ‘아리랑’에 못써요. 어제의 작품은 내일의 작품의 원수에요. 적이에요. 똑같은 인물의 성격이 나오면 안 되죠. 그래서 창작이라고 하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죠.”
-노력해도 안될 것 같은데요.(웃음)
“물론 작가적 재능이 있어야죠. 그러나 재능만 가지고 절대 안돼요. 작품마다 주인공의 성(姓)까지도 바꾸는 줄기찬 노력이 있어야죠.”
-선생님의 소설에는 러브스토리가 많이 나옵니다. 어떻게 사랑의 감정을 그렇게 절절하고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지요. 혹시 젊었을 때 연애 경험을 많이 하셨나요?(웃음)
“전혀 그런 건 아니죠.(웃음)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사랑이란 여러 명의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한 여자를 깊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죠. ‘한강’에서 유일민과 임채옥의 사랑은 남녀 간 사랑이 아니에요. 1차적으로 남녀 간 사랑이면서 2차적으로 통일화합을 얘기하는 거죠. 북쪽 여자와 남쪽 남자가 수많은 고난을 거쳐서 결혼까지 하는 게 통일이잖아요.”
그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이 파견한 미녀응원단 얘기를 꺼냈다. 응원단이 탄 버스를 보며 남쪽 총각이 이름이 뭐냐고 소리 지르자 한 북쪽 여성이 차창에 입김을 불어 자신의 이름을 쓰는 모습을 TV화면으로 보고 무릎을 쳤다. “그걸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몰라요. 60년 동안 남북 정권이 서로 적대하게 만든 장벽이 깨지는 데 사흘 밖에 안 걸렸어요. 민족동질성은 그런 거죠. 핏속에 들어있는 DNA란 말이에요.”
20년 글감옥, 후회 없어
-대하소설 3편을 쓴 20년 세월을 ‘글감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글감옥’에 갇혀 지낸 것에 후회는 없는지요?
“고통스러웠지만 보람 있었죠. 전북 김제의 아리랑 문학관, 전남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 등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문학관이 살아생전에 두 개씩이나 세워졌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과 보람은 없겠죠. 고통 당할 만 하잖아요.(웃음) 전혀 후회 없고 고맙고 과분할 뿐이죠.”
-그래도 글 쓰는 시간들은 고통스러웠죠?
“그럼요. 직업병이 공장 노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오른팔이 마비돼 두 달 동안 침을 맞아가면서 글을 썼어요. 탈장으로 ‘한강’ 끝나고 수술도 했죠. 날마다 책상에 꼼짝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보니 두 다리가 퉁퉁 부어 걷기도 어려웠죠. 땅이 흔들리는 현기증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알피니스트가 동상에 걸리고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각오를 하지 않고 산에 오르겠습니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열매를 주는 것이죠. 중간에 고통은 당연히 오는 거예요. 그래도 가장 행복할 때가 글을 쓰고 있을 때죠.”
-하루에 12시간씩 글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12시간을 넘어서 16시간까지 썼죠. 이유가 있어요. 자본주의 노동이 얼마나 치열해요. 말이 하루 8시간 노동이지, 치열한 경쟁에 모든 사람이 지쳤어요. 그런 그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려면 소설에 감동이 있어야죠. 그래서 그들의 두 배, 하루 16시간의 노동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루에 집필량을 정해놓고 쓰시나요?
“예.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하루에 평균 35매가 목표였어요. 많이 쓸 때는 45매까지 썼고, 글이 안 풀려 10~15매 정도밖에 못 쓸 때는 밤 작업을 통해 다 썼죠. 나이가 들면서 집필량을 줄였어요. ‘정글만리’는 하루 평균 20~25매 썼는데, 앞으론 10매 정도로 줄이려고 해요.”
-일요일은 쉬시죠?
“아니요. 일요일도 없어요. 일요일도 매일 10시간씩 글을 썼어요. 기상은 언제나 6시에요. 며느리가 ‘남편은 단 한 번도 깨워서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해요. 아빠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야 하니까, 제 아들도 습관이 된 거죠.”
-20년 동안 옥바라지한 아내의 잃어버린 인생을 찾기 위해서 20년간 아내를 모시고 매주 여행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약속 지키고 계십니까?
“하고 있지요. 집사람은 내 건강을 챙기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장보기를 해서 상을 차렸어요. 내가 쓴 글을 꼼꼼히 읽어 조금 이상한 부분은 종이에 일일이 지적해서 고치게 했죠. 그러니까 아내는 내 소설의 최초 독자였고, 최고의 열독자였고, 감독자였고, 지지자였어요. 그러면서 아내는 ‘사랑굿’ ‘어머니’ 시집도 냈죠.”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쓰고 계시죠. 육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200자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요. 손으로 쓰면 문장의 농밀감이 확실히 강해지죠. 작가가 글 쓸 때 처음에 떠오르는 건 내 문장이 아니에요. 두 번 생각해야 해요. 또 뒤집어 생각하고, 세 번째 나오는 문장이 자기 문장이죠. 앞의 문장은 뒤의 문장을 밀어내야 하고, 뒤의 문장은 앞의 문장을 끌어내는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돼요.”
-인터넷을 전혀 못하시나요?
“손자 두 녀석이 할아버지는 컴퓨터 켤 줄도 모른다고 놀리곤 하죠, 숫제 손을 안대요.”
-선생님도 파지 많이 내십니까?
“파지는 많이 안내는 편이죠. 동료들은 단편 120매를 쓰면 파지가 240매 나온다, 500매 나온다고들 하는데, 저는 20~30매도 안 나와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를 점검해야 하니까, 파지를 많이 내자고 생각하며 ‘정글만리’ 쓸 때 파지를 모아봤어요. 3600매 썼는데 파지는 500매 밖에 안돼요.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마지막 장면을 11번 고쳤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고치면 고칠수록 좋은 건 틀림없어요. 근데 잘 안되더라고요. 앞으로 많이 고치려고 해요.”
-소설가 꿈은 언제 키우셨나요?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개인 문집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때 머슴방에 가면 이야기 잘하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에게 ‘삼국지’ ‘수호지’를 들으면서 ‘어떻게 저 재미있는 이야기가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질까, 나도 저런 이야기 한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 아니겠느냐며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국문과에 들어가면 밥상을 걸게 차려놓듯이 글 잘 쓰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줄 알잖아요. 나도 서정주 시인, 황순원 소설가의 강의를 들으면 요령을 터득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 나와요. 졸업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대학은 글 잘 쓰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었다는 사실을. 젊은 문인들에게 주는 글이 있어요. ‘문학, 길없는 길’이 제목인데, ‘문학은 읽고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쓰고 또 쓰면 열릴 길’이에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이 세 가지를 게을리 하면 절대 길이 안보여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아니라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 순이네요?
“다독4, 다상량4, 다작2의 비율로 하면 좋아요.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그 다음에 읽은 시간만큼 그 작품에 대해서 생각해보세요. ‘왜 이런 이야기를 썼지’ ‘난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쓸까’ ‘나는 이보다 더 잘 쓸 방법이 있어?’ 이 3단계가 딱 정해져야 해요. 그리고 아무리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잘 썼는데 별것 아니네’ ‘나도 딴 방법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어’라는 생각을 가지세요. 객기든, 광기든, 만용이든 좋아요. 자신감이 들어야 쓸 수 있어요.”
현실 움직임이 곧 역사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일흔셋인데 그 흔한 성인병이 없어요. 먹는 약도 없죠. 요령은 소식입니다. 절대 배불리 먹지 않아요. 다음은 채식이죠. 고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먹어요. 매일 맨손체조를 해요. 학생들이 하는 국민보건체조 있잖아요. 학교 때 하던 그대로 두 번 되풀이해요. 체조를 하고 나면 절리고 맺힌 데가 다 풀려요. 온몸운동이에요. 그 다음에 매일 한 시간씩 산책해요. 휴가 와서도 매일 하고 있어요. 소식, 채식, 맨손체조, 산책 등 4가지가 건강유지 비결이에요.”
-최근에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암살’이라는 영화가 인기입니다. 친일파 처단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요. 해방 70년, 친일파 청산은 고사하고 친일파를 옹호하는 반역사적 행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친일파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한 것은 민족적 비극이죠. ‘태백산맥’에서 친일파들의 변절을 자세히 썼던 이유는 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아리랑’에서 일제 부역자들을 자세히 그려놨어요. 우리는 불행하게도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한 법 하나를 만들지 못했어요. 천만다행인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것이죠. 누가, 어떻게 친일을 했는가를, 그 객관적 기록을 분명하게 남겨둬야 해요.”
-신문이나 뉴스는 챙겨보시나요?
“8시뉴스는 꼭 봐요. 소설에 쫓길 때는 안 보지만 가능하면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죠. 왜냐하면 현실의 움직임이 곧 역사가 되는데 그걸 놓치면 안 되죠.”
-댁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한겨레신문을 봐요. 창간멤버이고 주주에요. 한겨레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도 중요한 것은 꼭 스크랩해요. 대학노트로 100권 이상 되죠.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의 사설을 비교분석할 수 있도록 한 지면은 논평까지 반드시 스크랩해요. 노트제목이 ‘손자들을 위한 논리교육’이죠. 손자들에게 보여줘요. 같은 견해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미묘한 차이를 알려주는데, 논술교육 따로 없더군요. 그것만 보면 돼요.”
-한겨레와 중앙일보처럼 좋은 사례도 있지만 우리 언론은 진보와 보수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언론은 존재해야 해요. 그러나 편견을 가지고 배타하지는 말아야죠. 서로 화합하고, 이해하면서 견제를 해야 하죠. 건설적 견제와 비판은 꼭 필요하죠.”
-교육 관련 소설을 준비하고 계시죠?
“한국교육의 문제는 심각해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와 있잖아요. 그걸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걸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요. 당초 올해 6~7월쯤 출간 예정이었는데 작년에 백내장 수술하는 바람에 1년이 연기됐어요. 내년 6월쯤 2~3권 분량으로 나올 것 같아요.”
인터뷰가 끝나고 한국기자협회 창립 51주년 기념 메시지를 부탁했다. 공교롭게도 기자협회 창립일인 8월17일은 조정래 작가의 생일이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글귀를 썼다. “진정한 기자의 정신은 진실과 정의를 사수하는 것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그 정신을 지켜 기자협회가 우리 사회의 큰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