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나 명함 두려워해선 기자 못하죠"

[밖에선 본 기자 밖에서 본 언론](8)이제석 광고연구소 대표

기사 많지만 제대로 된 기사 없어
뉴스 순서·전달방식 모두 판박이

정보가 아니라 가공이 중요
맥 짚어주는 뉴스 있었으면

인터뷰 끝난 뒤에도 사실관계
꼼꼼히 확인하던 기자 기억나


이제석씨를 만나러 망원 한강공원 한 카페에 도착했을 때 성산대교에 어둠이 막 내리고 있었다. 막힘없이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그는 주류에 도전하고 권위를 뒤틀며 ‘광고쟁이’의 꿈을 키워왔다.


그는 세계 유수 국제광고공모전을 휩쓸어 ‘광고천재’로 불린다. 그런 그에게 70년 역사의 경향신문은 기꺼이 1면을 내줬고, 그는 컵라면과 삼각 김밥의 파격적인 이미지로 고달픈 청춘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1면을 내준 게 고마웠어요. 경향신문과 작업을 하면서 고집이랄까, 프로정신을 갖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청년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미래 세대에 켜진 빨간불이 1면에 들어가는 어떤 기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컵라면을 올렸습니다.”



-왜 청년문제 메시지를 던졌나.
“우리 사회 문제는 대부분 청년문제에서 파생됐죠. 단순히 취직의 문제가 아니라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업에 대한 철학이 없고 정체성이 없어요. 청년문제는 제도교육, 저출산, 고령화, 대기업 쏠림, 인구 감소 등 우리 시대 사회 문제의 씨앗입니다.”


-언론이 청년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나.
“표현적인 면에서 청년세대에 대한 접근이 미숙하다고 봐요. 활자를 통한 메시지, 의미 전달이나 접근 방식, 콘텐츠의 표현 방식도 미숙하죠. 종편 프로그램은 언론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지만 많은 시도를 하고 있어요. 뉴스를 풀어서 해석해주거나 패널들이 나와서 설명하는 등 접근 방식은 진보적이죠. 갓난아기가 제일 먼저 보는 게 스마트폰입니다. 딸랑이나 동화책을 안 봐요. 스마트폰 안에 모든 게 다 있어요. 그런 시대에 맞춰서 뉴스를 전달해야 합니다.”


-신문은 즐겨 읽나.
“사실 신문을 잘 못 봐요. 인터넷으로 짬 날 때 헤드라인 훑어보는 정도죠.”


-언론이 위기라고들 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사는 많지만 제대로 된 기사가 없어요. 뉴스는 넘쳐나는 데 판박이에요. 심지어 뉴스 순서도 똑같아요. 뉴스 전달 방식도 다 똑같고…. 광고업계만 해도 다른 곳에 없는 아이템을 만들려고 해요. 이제는 정보가 아니라 가공의 문제 아닌가요. 독자 입맛에 맞게 뉴스를 보여주든지, 맥을 짚어주든지 해야죠. 기사라고 꼭 글로 쓸 필요가 없어요. 방식, 내용도 바꿔야죠. 소비자에게 귀를 기울이면 답이 나올 겁니다.”


-‘기레기’라는 말 들어봤나.
“기러기 아빠가 기레기인가? 처음에 무슨 소린지 몰랐어요. 예전에 없던 말이잖아요. 비하하는 말이 개념화됐다는 건 하나의 사회현상이죠. 의사나 소방관을 비하하는 말은 없잖아요. 이미지가 망하는 게 진짜 망하는 거예요. ‘기레기’라는 말을 치욕스러워해야 해요. 매체 홍수 속에서 기자 같지 않은 기자들을 종종 봅니다. 물론 안 그런 기자도 많죠. 좋은 기자들이 있으니까 세상이 돌아가죠.”


-기억나는 기자가 있다면.
“애착이 가는 기자들이 있어요. 굳이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렇게 하는 기자들이죠. 한 신문과 인터뷰 때 대구에 있는 사람을 언급했는데 대구까지 찾아가 취재하더군요. 좋은 장면을 담기 위해 위험한 크레인에 오른 사진기자도 봤어요. ‘몇 년도 뭘 했는지’ 등 사실 관계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기자도 생각나요. 대충 써도 될 것 같은데 프로정신이랄까, 진정성을 가진 기자들이죠.”


-여러 언론사와 공익광고 캠페인을 진행한 이유가 궁금하다.
“신문은 기사와 칼럼을 통해 콘텐츠를 전달하잖아요. 공익광고도 콘텐츠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이슈와 문제를 공익광고로 전달할 수 있거든요. 광고전문가와 언론이 사회에 기여하고 상생할 수 있는 모델이 됐다고 봅니다.”


그는 2009년 3월부터 1년간 영남일보와 함께 ‘좋은세상 만들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신문이 지면의 일부를 할애해 비영리단체의 광고를 무료로 내주는 이른바 ‘프로보노 운동’의 최초 사례였다. 첫 회 ‘이불신문(영남일보 2009년 3월2일치 14·15면)’은 언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신문 2개면에 걸쳐 이불 한 장이 달랑 그려졌고,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불우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세요’라는 카피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사와 다른 새로운 형태의 비주얼뉴스였다.


-경향신문 창간 65주년 1면에는 ‘기자윤리강령’을 내걸었다. 왜 하필 기자윤리강령이었나.
“기자들이 들고 다니는 ‘기자수첩’ 첫 장에 윤리강령이 있다는 걸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광고회사는 광고를 잘 만들어야 하고, 카페는 커피콩을 맛있게 볶아야 하듯 기자는 기사를 잘 써야 하죠. 그러려면 직업적 사명감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자윤리강령은 기자정신이나 정체성, 소명의식과 맞닿아 있죠.”


-스스로도 ‘광고천재’라고 생각하나.
“책(광고천재 이제석)에다 서명할 때 ‘천재’를 매직으로 지우고 ‘천치’라고 써요. 천재라는 수식어 때문에 좋은 사람 많이 잃었어요. 다가오려다 멀어지는 사람도 많았고. 친해지고 난 다음에 ‘네가 그런 놈이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 재수 없이 느껴졌다’고 후일담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는 천재는 상식 밖에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라고 했다. “너무나 갈구하는 순간, 어떤 것에 꽂혀서 흥분하는 경험을 가끔 합니다.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랄까요. 무언가에 빙의가 돼서 주체할 수 없는, 전류가 몸에 흐르는 느낌을 가끔 받아요.”


-창간 70주년 경향신문 1면 디자인할 때도 그런 영감을 받았나.
“그때도 사실 전기가 쫙 왔어요. 가이드 뜨다가 뒷목에 전기가 오면서 딱 펜을 놨어요. 보통 아이디어를 2주 정도 뜨는데 그때는 사나흘하고 말았어요. 사람들이 봤을 때 1면에 컵라면 올린 게 별것 아닐 수도 있죠. 하지만 접점을 찾았다는 느낌이랄까. ‘이 맛에 광고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는 계명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광고회사에서는 줄줄이 낙방했다.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낮에는 미술학원 알바를 하고 밤에는 동네 안경점이나 사진관의 선전물과 로고를 만들어 주는 ‘간판쟁이’ 일을 시작했다.


-학벌 때문에 취직을 못했다고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안 뽑은 이유를 안 가르쳐주니까요. 인상이 안 좋았거나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죠. 다만 주류가 아니었던 게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에요. 뉴욕에서 돌아와 느낀 건데, 아직도 광고회사에서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광고업계는 계파가 있고, 어디 대학 출신이냐가 중요하죠. 대학 2~3학년 때 홍대 앞에서 인턴으로 일했는데, 당시 실장이 ‘지방에서 잡것들이 올라와서….’ 그런 얘기도 하더군요. 지금도 그렇게 보이는데, 당시에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는 2006년 9월 단돈 500불을 들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펙 한번 만들어보자’ ‘진짜 실력으로 세상과 부딪혀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의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 3학년에 편입했고, ‘한 해 대기오염으로 6만명이 사망합니다’라는 ‘권총굴뚝’ 작품으로 세계 3대 광고제인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해외 유명 광고공모전에서 40차례 이상 입상했다. 뉴욕의 유명 광고회사들에서 일했고 입사 1년차에 개인 작업실을 내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그런 그가 탄탄대로의 미국 생활을 접고 돌연 한국으로 돌아와 2009년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차렸다.


-왜 한국으로 돌아왔나.
“뉴욕에 있으면서 한국 회사들과 협업하러 종종 들어오곤 했어요. 얘기를 나눠보니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열망이 강하더군요. 한국 사회는 광고의 불모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주니어급이 아이디어를 낼 수 없고, 10년 정도 그 바닥에서 개고생을 해야 기회를 주는 광고업계 시스템이 문제였지, 대중들 수준은 아주 높고, 다르게 보였어요. 잘만 치고 들어가면 ‘내가 1인자가 될 수 있겠다’ 생각했죠(웃음).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업계를 내 손으로 바꿔보겠다고 베팅한 거죠. 창업한 지 6~7년 정도 됐는데 절반 이상 성공했다고 봅니다. 광고업계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나.
“한국 광고는 연예인이 나와야 하고, 비싼 모델 쓰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안 거죠. 광고와 동떨어진 행정기관들과 손잡고 세계 수준의 옥외광고를 만들어 버리니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저는 다만 가지 않는 길을 간 것뿐이에요.”


-어디와 작업하고 있나.
“지금은 소방서, 검찰청과 일하고 있어요. 문화산업 육성 관련해 지자체 광고도 유치했죠. 공익광고 비중을 70~80% 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익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그런 광고를 하고 싶어요.”


경찰이 잠 안자고 국민을 지킨다는 강남서 ‘부엉이 벽화’나 ‘탈의중’이라는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보수 가림막, ‘총알 같이 달려가겠습니다’는 부산 남부서 옥외광고 등 이제석 광고연구소가 만든 공익광고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은 어디서 나올까. 그는 어느 순간 번개 맞은 것처럼 온다고 했지만 천생 아이디어 중독자다. 상식을 뛰어넘는 도발 속에는 누우면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 메모하는 직업적 근성이 있다.


-유명해졌고 개인회사도 갖고 있다. 또 다른 꿈이 있는지.
“저에게 꿈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뭐가 되겠다는 점으로 끝나죠. 목표점만 찾다보면 방향을 잃어버려요. 어떤 사람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원칙과 소명의식을 갖고 가다보면 뭐라도 됩니다. 그런 점에서 광고쟁이의 길을 죽 가고 싶어요.”


기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물었다. “프라이드를 가졌으면 해요. 펜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잖아요. 잘못된 법을 개정할 수 있고, 억울한 사람들도 도울 수 있죠. 월급이나 명함, 사원증을 두려워해서는 기자 못하지 않을까요?”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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