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노래로 달래며 살았죠"

[밖에선 본 기자 밖에서 본 언론](9)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씨

차량이 망월동 5·18묘역 입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김종률씨의 기억은 35년 전 봄날을 더듬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부여안고 살던, 그야말로 황폐한 시절이었다.

 

1982년 4월쯤, 광주항쟁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혼령과 그의 들불야학 시절 후배 박기순의 혼령이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후배들은 두 남녀의 혼백을 위로하는 노래극을 만들기로 했다. 대본은 소설가 황석영씨가 맡고, 그는 작곡을 담당했다. 노래극 8곡 중 7곡은 그가 작사 작곡해 놓은 걸 가사만 바꿨는데, 영혼결혼식을 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두 남녀가 후배들한테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는 마지막 노래가 없었다.

 

“앞부분 두 소절은 제 머릿속에 있었어요. 그 소절을 흥얼거리니 일사천리로 작곡이 되더군요. 그렇게 4시간 만에 쓴 곡에 황석영씨가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러보니 입에 딱딱 달라붙어요. 녹음한 곡을 들으면서 기뻐하던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저항과 연대의 현장에선 어김없이 큰 소리로 울려 퍼지고, 분노와 좌절, 상실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용기를 북돋워준 치유의 노래로.

 

지난 9년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부르지 못했던 이 노래는 지난 18일 5·18 묘지에서 9년 만에 1만 여명에 의해 제창됐다. 김종률씨는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이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김씨와의 인터뷰는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그가 재직 중인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실과 기념식 리허설에 참석하는 그를 동행하며 진행했다.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

 

-1980년 5월 광주가 이후 3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항상 5월이 오면 열병과 우울감을 겪어요.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군사 독재정권을 허용했다는 분노가 뒤섞여 힘들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는 거죠. 이 노래를 통해 그 날을 기억하고 그러면서 나를 용서하며 살지 않았나 생각해요.”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애창곡이 됐습니다. 이 노래를 작곡했다는 운명 때문에 삶의 원칙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헛되게, 잘못된 삶을 살 수 없었죠. ‘5·18 당시 희생하신 분들을 욕되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삶 전체를 규정했던 것 같아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라고 떠들진 않았지만 함부로 살 순 없었어요. 도덕 선생님처럼 항상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편에선 ‘그만 좀 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5·18 역사가 제대로 정립됐다면 그만 해도 되겠지만 왜곡되고 있잖아요. 300명 가까이 희생됐는데 왜곡된 상태로 두라는 건 말이 안 되죠. 영혼결혼식을 통해 하늘로 떠난 두 남녀는 ‘산 자여 따르라’고 했지만 지난 9년간 우리는 다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혼백이 맺어진 두 분이 산 자였죠.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5·18을 기억한 분들이 계셔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논란이 됐을 때 어떤 심정이셨나요?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임’이 김일성이고 ‘새날’이 체제전복이라니요. 보수논객들이 색깔을 입혀 종북으로 몰아가는 데 기가 막히더군요. 사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뜻을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노래가 아니라는 걸 알았겠죠. 그럼에도 제창을 못하게 한 건 광주를 고립시켜 정치적 이득을 보려고 한 것이죠.”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9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기념일로 제정된 이후 2008년까지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노래하는 ‘제창’으로 불렸으나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부터 기념식 본행사에서 제외됐고 2011년부터는 합창단의 합창으로 불렸다.

 

-‘임’과 ‘새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임은 직접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의미해요. 넓게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고 노력한 분들을 지칭하는 것이죠. 새날은 좁게는 전두환 정권이 물러가는 날이고, 넓게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날이죠.”

 

-새날이 왔다고 생각하세요?

“사실 이 노래를 안 부르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죠. 하지만 이 노래가 영원히 불릴 거라고 봐요. 왜냐면 우리 인간은 어리석어서 금방 잊어버려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퇴보했잖아요. 그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되지만 그럴 수 있거든요. 이 노래는 우리의 각오라고 봐요. 저는 이 노래를 세 단어로 얘기합니다. 존경, 찬사, 각오. 줄여서 ‘존찬각’이라고 하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희생했던 분들에 대한 존경입니다. 젊은 남녀가 죽음을 뛰어넘어 맺어지는 데 대한 찬사구요. 어떤 어려움과 힘듦이 오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시작일 뿐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본행사 식순에 포함됐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지난 시절 5·18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일부 보수논객들의 주장이 여론인 양 호도되면서 5·18을 폄훼·왜곡했어요. 5·18 때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 왔다는 주장까지 나왔잖아요. 본행사 제창을 계기로 5·18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시작이죠.”

 

-대학 3학년 때 5·18을 겪으셨죠?

“당시 광주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뛰어나왔어요. 다들 분노했고, 광주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였습니다. 조금 더 용감해서 앞에 선 사람이 있었고, 뒤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 뿐이죠.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어요.”

 

-친구나 지인 중 희생을 당한 분이 계신가요?

“지인들 중 두 분이 돌아가셨어요. 한 분은 평생 폐 속에 총알을 갖고 계시다 돌아가셨죠. 그런 분들이 주변에 꽤 있어요.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친구들도 많죠.”

 

-총소리도 들으셨나요?

“그날(80년 5월19일 공수부대가 광주역 앞에서 발포한 날) 저는 시위대 뒤쪽에 있었어요. 사람들이 막 달려오는 거예요. 공수부대가 발포했다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어요. 얼핏 들으니 총소리가 나는데 살아야 되니까 정신없이 도망을 쳤죠.”

 

-또 기억나는 장면은?

“도청 앞 상무관에 간 적이 있어요.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 상무관 강당에 60~70구의 시신을 모아놨는데 너무 참혹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은 관 위에서 뛰놀고 있고 퀭한 눈동자의 어머니는 넋이 빠져있고…. 그 광경을 보면서 ‘노래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노래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것보다 큰 힘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노래가 총칼 앞에 아무 힘이 없더라구요.”

 

그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1978년 전남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1학년 때 당시 전일가요제에서 황순원의 단편 소설 ‘소나기’에서 따온 ‘소나기’라는 곡으로 대상을 탔고, 이듬해에는 친구 2명과 혼성 트리오로 출전한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노래로 은상을 받았다.

 

-5·18 당시 기자를 만난 적 있나요?

“직접 만난 적은 없었죠. 우린 그때 언론보도를 보면서 다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해댔어요. 폭도라 하고, 우리 얘기를 왜 안 듣는지 화가 났죠. 극도로 언론을 불신했습니다. 기자가 정말 미웠습니다. 죽음을 뚫고 광주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외국 기자들은 있는데 한국 기자들은 왜 안 들어오는지, 기자라고 했으면 아마 잡혀서 혼났을 겁니다. 지금이야 존경하는 기자도 많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 기자들은 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언론은 사실과 다른 얘기를 했죠.

“왜 우리를 폭도라고 하는지 억울했어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장면을 하나도 나오지 않더군요. 편집을 어떻게 그리 잘하는지.”

 

-광주MBC 방송국 건물이 불타기도 했는데.

“그런 이유 중 하나였죠.” 광주시민들은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담요로 창문 막고 1박2일 녹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 어떻게 작곡했나요?

“이 노래가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됐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5·18 2주기를 앞둔 1982년 4월쯤 만들어졌어요. 5·18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잡혀가는 무서운 분위기였는데 문화운동 하는 사람들이 2주기 앞두고 아무것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지 않느냐고 했어요. 그러다 두 분의 영혼결혼식(1982년 2월20일) 소식을 들었고 선물을 하나 하자고 했죠. 장르를 노래극으로 정했고 전체 대본을 황석영씨가 쓰고 제가 작곡을 담당했어요. 황석영씨 집에 모여 1박2일간 전격적으로 이뤄진 작업이었어요.”

 

-노래극 스토리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죽어서라도 맺어지는 슬픈 사랑이었죠. 물론 허구죠. 노래극에 쓰인 곡은 모두 8곡인데, 7곡은 제가 만들어 놓은 것을 조금 바꾸면서 썼는데 1곡이 없는 겁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두 남녀가 영혼결혼식을 하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마지막 합창곡이었죠. 당시 제가 황석영 선생 집 가까이에 살았어요. 곡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이 곡 앞부분 두 소절은 제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던 건데, 그 소절이 생각나서 입 밖으로 내보니까 곡이 일사천리로 만들어졌어요. 4시간 만에 썼죠.”

 

-곡을 가져가니 황석영 선생이 뭐라고 하던가요?

“불러보라고 하더군요. 노래를 흥얼거리니까 괜찮다고 하셨어요. 가사만 집어넣으면 되는데 얼론 안 나왔죠. 황석영 선생이 ‘에잇 가사가 별 거야’하면서 서재로 들어가셨어요. 그리곤 가사를 막 쓰는데 당시는 그게 뭔지 몰랐죠. 나중에 보니까 백기완 선생의 장편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몇 부분을 발췌해서 쓰신 겁니다. 조사 정도만 바꾼 거죠. 곡에 가사를 붙여 불러보니 입에 딱딱 달라붙는 겁니다. 녹음된 곡을 들었는데 다들 ‘괜찮은 것 건졌다’는 눈빛이었어요.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했고, 영혼결혼식을 한 두 사람에게 좋은 선물이 됐다는 만족감도 있었죠.

 

-당시 어떤 분들이 노래극 녹음에 참여했나요?

“광주에서 연극, 탈춤, 국악 등 문화운동을 하던 분들이죠. 12~13명 정도였죠. 황석영씨는 좌장이셨어요.”

 

-1982년이면 서슬 퍼런 시절인데.

“노래극 제작에 참여한 분들은 다들 요주의 인물이라 담당 형사가 있었어요. 말이 새나가면 잡혀가니까 모인 김에 전격적으로 만들었죠. 2층 거실에서 창문을 군용담요로 막아놓고 조그만 카세트로 녹음했어요. 방음을 해야 했고, 또 보안문제도 있었죠. 원본테이프를 들어보면 개 짖는 소리랑 기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요.”

 

-작곡을 김종률씨에게 맡긴 이유가 있었나요?

“대학가요제 등에서 수상을 한터라 좀 알려졌죠. 황석영 선생이 나를 여러 번 불러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죠. 노래극 만들자고 했을 때 ‘까짓거 합시다’라고 흔쾌하게 말했어요.”

 

-노래극은 공연이 됐나요?

“1983년도에 조용히 진행됐다고 들었어요. 당시 군 복무중이라 보지는 못했죠.”

 

노래극의 마지막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말부터 광주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5·18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씨가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 규명을 위해 40일간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뒤였다. 김종률씨는 83년 봄에 그 노래를 서울 대학가에서 들었다. “첫 휴가를 나와 친구랑 연세대 정문 앞을 지나는데 시위하던 학생들이 노래를 불러요.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였어요. 친구가 ‘네가 군에 있을 때 만들어진 건데 요즘 학생들이 시위하면서 부르는 대학가 최고히트곡’이라고 하더군요. 자세히 들어보니 제 노래였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주제곡으로 한 뮤지컬을 제작하는 게 꿈이시죠?

“당시 노래극을 줄거리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요. 프랑스 대혁명을 모티프로 삼은 ‘레미제라블’, 베트남 전쟁이 모티프인 ‘미스사이공’이 전 세계에서 울려 퍼지지 않나요. 뮤지컬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이 우리들 삶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하고 싶어요.”

 

-언론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촛불 민심을 만든 건 언론의 힘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실 보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여전히 많아요. 쉽게 사라지지 않겠죠. 그런 잘못된 주장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기대합니다.”

 

총칼 앞에 무력했던 노래는 역설적으로 총칼보다 더 오래가고 강했다. 80년 5월의 참상을 목격하고 노래가 무슨 도움이 되냐고 했지만 결국 김종률씨의 노래 하나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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