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기자들이 표지모델이던 잡지가 있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프레스센터가 2004년 1월까지 5년간 발행한 월간 소식지 ‘기자통신’. 손바닥만 한 이 잡지에는 언론계 현황과 정보, 기자들의 목소리, 할인쿠폰까지 빼곡하게 담겨있었다. 매월 표지 모델은 아이돌가수 같은 포즈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기자들이었다. 20년 전 기자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기자통신을 통해 지금과 다르면서도 또 같은 기자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인터넷→사이버→디지털
“노트북 컴퓨터. 워드 프로세싱에서 인터넷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최첨단 문명의 이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따금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가지고 다니자니 무겁고, 다루기는 까다롭고, 게다가 고장이 나기라도 하면…”
기자통신 2000년 8월호 <동료들이 전하는 노트북 200% 활용법> 기획기사의 서문이다. 노트북을 대하는 기자들의 고충이 느껴진다. 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한 그때 기자들은 노트북, 인터넷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전화선을 이용하는 인터넷 접속을 어려워했고 컴퓨터 운영체제가 “간결한” 도스(DOS)에서 “말썽 많은” 윈도우(Windows)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도 골머리를 앓았다.
인터넷을 처음 맞닥뜨린 기자들은 업무방식의 변화를 겪으며 고군분투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원고지와 팩스로 기사를 송고하던 방식에서 1994년 노트북 지급과 PC통신 활용, 1996년 인터넷 도입 등으로 변화를 겪은 것이다. 1999년부터 지금과 비슷한 기사 전송시스템이 널리 활용됐지만 아직 모든 기자가 능숙하게 인터넷을 다루진 못했다. 그해 7월 과학기술부 출입기자단이 국내 최초로 만든 기자단 홈페이지(science.gija.com)가 화제가 됐을 정도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였다.
그때 국내 언론계에는 닷컴 열풍까지 불었다. 흐름에 따라 1999년 기자통신은 <21세기는 사이버 기자를 원한다>, <사이버 공간, 기자에게 무엇을 얻고 느끼게 하나>, <데이터베이스 활용하는 미국 탐사보도> 등으로 온라인 기사와 인터넷·컴퓨터 활용 보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0년 하반기에 접어들자 언론사의 인터넷 사업은 잠시 주춤했다. 기자통신은 그해 10월 “끝없는 발전을 거듭할 것 같던 인터넷 사업이 수익모델이 없고 경제가 위축되면서 위기감에 싸여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홍진석 머니투데이 인터넷 팀장은 “눈에 띄는 (인터넷) 사업성과와 영향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은 출고시간, 콘텐츠 스타일, 취재방식 등이 여전히 오프라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언론사 부설 온라인미디어 간 경쟁은 탈(脫)오프라인이란 선결조건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탈오프라인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다. 디지털 경쟁은 더 치열해졌지만 아직도 언론사의 주 수입원은 광고와 협찬이고, 온라인에서 지속가능한 수입원을 찾지 못한 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개별 언론사 웹사이트로 뉴스를 소비했던 그때와 달리 포털이 온라인 뉴스시장을 독식한 탓도 크다.
기자들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지 않았다. 2000년 기자들은 “신문사 증면 경쟁으로 지면이 56~60면으로 늘어났다. 인터넷 기사까지 써야 해 부담이 크다” “독자와의 대화, 취재 후기, 광고성 특집 기사 등 인터넷신문 때문에 일이 두 배나 늘었다” “마감 없는 디지털시대 살인적 격무”라고 토로했다. 지금 어느 기자에게 묻더라도 똑같은 하소연이 나올 것이다.
늘 위기였던 한국 언론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들은 늘 위기였다. 특히 기자통신이 발행을 시작한 1999년은 IMF 외환위기 폭풍이 언론계까지 휩쓸고 간 직후였다. 창간호(1999년 1월호)에 실린 <IMF 한파, 기자 사회를 얼마나 얼렸을까>를 보면, 한국기자협회 회원 수는 IMF 직전인 1997년 10월 6872명에서 1년 만에 6000명(12.7% 감소)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언론노련(현 언론노조)이 산하 58개사 전체 직군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1년간 8500여명, 하루 20명꼴로 실직했을 만큼 외환위기가 할퀸 상처는 깊었다.
‘샐러리맨 기자’라는 말이 부쩍 많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2000년 4월호에서 당시 한 기자는 “기자라는 고전적 의미가 탈색되면서 하루 벌어(취재) 하루 장사하는(기사) 샐러리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살벌한 구조조정을 목격한 기자들은 큰 상처를 받았고 정체성의 위기까지 겪었다. 기자통신은 “경제적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환경의 영향으로 기자들의 벤처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며 “‘평생 기자’란 공허한 구호일 뿐”이라는 한 기자의 발언을 전했다. 경직된 조직문화와 소신·공정보도하기 힘든 환경, 뚜렷한 비전 부재도 기자들의 벤처행 이유로 지목됐다.
이런 추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주요 신문사에서 20명 가까운 기자들이 퇴사하거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으로 이직·창업했다. 그중 10여명은 10년차 미만이었다. 불확실한 미래와 상대적으로 적은 급여, 과중한 업무 등 언론계를 둘러싼 부정적 환경이 이들의 퇴사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년 전과 똑같다.
언론의 신뢰 회복과 언론개혁 문제, 기자의 윤리의식도 그간 큰 보폭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999년 취재 중 얻은 비공개 정보를 주식 투자에 이용해 수억원대 차익을 챙긴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종합일간지 기자, 여권인사에게 ‘언론대책 문건’을 작성해 건네 논란이 된 또 다른 기자,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의 ‘기레기’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신뢰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언론이 개혁의 대상이라는 오명은 여전하다. 기자통신이 창간특집으로 다룬 <언론개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지금의 기자들도 곱씹어야 하는 이유다.
이루지 못한 평양특파원의 꿈
기자들은 ‘기자통신’에서 고민을 나눴고 논쟁을 벌였다. 덕분에 기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이 여기 담겼다.
주 5일제 논의가 한창이던 2001년 당시 2년차 조재길 한국경제 기자는 “‘기자는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더 많이 일하는 직업’이라고 수없이 들었지만, 변화의 물결은 결국 거스를 수 없을지 모른다”고 전망하면서 “주말에 책 읽고 공부하면서 내공을 쌓고 싶다”고 밝혔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주 5일제는 자리 잡은 모습이다. 그러나 모든 언론사에서 완전히 정착됐다고 보긴 어렵다. 어느덧 중견 기자가 된 2017년의 조 기자는 “일주일에 6번 신문을 만드는 기자들이 완전한 휴일을 만끽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아직도 갈 길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2000년 1월 <새천년을 맞이하는 기자들의 소망> 특집에서 8년 간 북한만 담당해왔다는 이영종 중앙일보 기자는 “주석궁을 출입하는 평양특파원이 꿈”이라고 했다. 올해로 25년째 북한·통일분야를 전담하고 있는 이 기자는 아직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평양특파원은 남북한이 통일되거나 교류·왕래가 ‘사실상의 통일’에 가깝게 진행되는 시점을 상정한 개념”이라며 “평양특파원이 되길 포기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물론 우리 언론이 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기자통신 속지뿐 아니라 표지에도 수많은 기자가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1999년 11월호 표지모델은 정연주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그는 몇 년 후 KBS 사장에 올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 8월8일 강제 해임됐다. ‘8·8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은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을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라크전쟁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진숙 MBC 기자도 2003년 4월호 표지 모델이었다. 9년 후 이 기자는 공정방송을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MBC기자협회에서 제명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현재 대전MBC 사장인 그는 구성원들에게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5년1개월 동안 발행된 61개 표지 중 유독 눈에 띄는 건 흑백사진인 2000년 1월호다. 한국일보에서 36년 간 기자 한길을 걸어온 정경희 선생과 입사 2년차 김미경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기자가 나란히 선 모습이다. 표지이야기는 정 선생과 김 기자의 대담으로 꾸려졌다. 고인이 된 정 선생은 그때 후배들을 향해 “언론의 역할은 사회적 이념, 비전, 꿈을 찾아내는 것” “샐러리맨으로 안주해선 안 된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현실에 참여하라” 등 애정 어린 당부를 전했다.
워싱턴 특파원에서 두 달 전 복귀한 김 기자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표지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많아요. 그중에서 정 선생님처럼 저널리즘, 기자의 사명감을 가르쳐 줄 거목 언론인들의 부재가 가장 큽니다. 젊은 기자들에게 존경할 만한 선배, 롤모델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지난 20년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