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했지만 죽비같았던 기자, 정남기형을 보내며

故 정남기 한겨레신문 기자 추도사

故 정남기 한겨레신문 기자(사진=한겨레신문) 정남기 한겨레신문 기자가 지난 4일 오랜 암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57세. 1961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국제부, 경제부 등을 거쳤다. 또 경제담당 논설위원과 경제부장, 한겨레 자매지인 경제월간지 이코노미인사이트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한겨레신문은 지난 6일 부고기사에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과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현안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경제 기사와 칼럼으로 독자와 만났다”고 정 기자를 소개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입사동기인 백기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의 추도사를 싣는다. 그 아래에는 6일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열린 고 정남기 기자의 영결식, 앞서 별세소식 등을 전한 기사의 링크를 붙인다. 

 

고 정남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건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직전이었습니다. 
회사 논설위원실에서 남기형의 칼럼을 담은 기념패를 만들어갔습니다.
패에는 ‘사랑하는 정남기 기자의 쾌유를 빕니다’란 문구와 함께 ‘소현세자와 죽음의 추노꾼들’이란 그의 칼럼을 담았습니다. 
남기형은 약 기운에 힘들어하면서도 그 패를 보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 패에 28년 한겨레에서 살아온 당신의 삶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남기형은 병실을 찾은 저희들에게 “이제껏 살고 보니 가장 남는 건 사람이더라. 그중에서도 내겐 한겨레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기형은 또 “한겨레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남기형은 말하길, “일을 하다보면 일반적이거나 쉬운 프레임으로 글을 쓰는데 나는 달랐던 사람, 늘 다르게 보려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남기형은 한겨레 식구들이 자신을 늘 다르게 보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해주길 바랬습니다.  

 

남기형은 의욕적인 투병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무척 그리워했습니다.
암과 싸우다 보면 대개 은둔하거나 사람을 피하는데 남기형은 사람들과 함께 병마에 맞서는 길을 택했습니다.
입사 동기 모임에도 두서너달에 한번씩 나와 담담하게 식사하고 얘기나눴습니다.
지난해 가을 폐렴으로 입원하기 전 동기모임에 나와 꼿꼿이 앉아 식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대학 때 서클 모임 동료들과도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며 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일년여 좀 더 전인 2016년 11월께 동기들과 함께 그의 집을 찾은 뒤, 대모산 자락에 올라 햇살을 맞으며 바람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음 속으로 걱정하던 제가 오히려 그의 꿋꿋한 모습을 보고 안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대모산에서 헤어진 뒤 시내로 들어오니, 첫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청계광장의 촛불과 대모산 자락에 서서 웃음짔던 남기형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남기형의 삶도 그 해의 촛불처럼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기원했지만, 이제는 헛된 바램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남기 기자는 한겨레가 항상 깨어있도록 채찍질하는 죽비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칼럼으로 꼽은 ‘소현세자와 죽음의 추노꾼들’에서, 소현세자는 주자학의 명분론에 집착하던 조선 조정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청나라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정 기자는 소현세자처럼 한겨레가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새롭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도록 분투했습니다.
편집국에서 정 기자와 제가 경제부장과 정치부장으로 일하던 시절 때때로 논쟁을 벌인 기억이 있습니다.
회사 앞 호프집에서 둘이 앉아 저의 편향된 정치 시각을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글을 통해 기성의 시각에 도전했습니다. 몇몇 글들은 사내외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에서 정 기자가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틀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편향됐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걸 떠나 정 기자와 함께 일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정 기자가 행한 그 모든 수고로움은 그가 솔직하고 충직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를 너무도 좋아하고 사랑했기에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 기자는 사실에 입각한 보도를 추구하는 담백한 언론인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에는 진영논리, 진보를 가장한 허위의식, 본질을 외면한 채 변죽만 울리는 일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습니다. 
경제부장 시절 쓴 ‘돈 없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란 칼럼에서 ‘나는 돈을 향한 사람들의 열망을 단순한 이기심이나 탐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라고 해야 맞을 듯 하다’고 썼습니다.
생전에 병실에서 이 칼럼이 화제에 오르자 정 기자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을 떠올리며 칼럼의 논거로 들었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 항상 공부하고 노력한 흔적이 있습니다.

 

정 기자는 비판 보다는 대안을 찾고,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합리적 저널리스트였습니다.   
한 회사 후배는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의 글에서 “정 선배를 한때 보수적이라고 오해했다.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정 선배는 누구보다 보수 기득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다만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물지 않으려 했고, 크고 작든 진보를 위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고 썼습니다.

 

정 기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후배들은 정 기자를 깐깐하지만 속정 깊은 선배로 기억합니다.
데스킹 할 때면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매우 꼼꼼했습니다.
사실관계를 따질 때는 깐깐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 마음쓸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음식점에서 구부정한 허리를 벽에 기대고 한쪽 발을 세운 채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보며 다소곳이 말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세련된 말씨는 아니지만 띄엄띄엄 옮기는 말엔 따뜻함이 스며있었습니다.

 

정 기자는 클래식부터 아이돌까지 모든 음악에 정통한 세련된 문화인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학생운동에 헌신해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대학 후배들은 그가 솔직하고 헌신적인 선배였다고 말합니다.
좋은 말로 꼬득이거나 에두르지 않았습니다.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해 공감을 얻곤 했습니다.

 

이 모든 상찬보다 더욱 값진 건 그가 마지막 날까지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용기있게 투병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만 2년이 좀 넘게 투병했지만, 우리는 그가 앞으로도 1년은 더 너끈히 버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용기있게 병마와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큰 힘이 됐습니다. 부인과 두 아들, 아버님, 어머님 등 가족이 없었다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인 이숙희씨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남기형의 마지막 가는 길에 가장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남기형은 떠나면서 나를 기억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누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했습니다.
비록 육신이 떠나더라도 형의 이름과 생각은 영원히 남습니다.

 

남기형,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한겨레에 바친 28년 청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57년 삶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 편히 영면하소서. <백기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고 정남기 기자 관련 기사 링크

-고인의 영결식 관련 기사 : “한겨레에서 행복했던” 정남기 기자 영원히 잠들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6564.html

 

고인의 부고기사 : ‘합리적 진보’ 추구한 경제저널리스트 정남기 기자 별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26395.html

 

고인이 생전에 남긴 기사 모음 :
http://search.hani.co.kr/Search?command=query&keyword=%EC%A0%95%EB%82%A8%EA%B8%B0&sort=d&period=all&medi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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