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 경력 못 살리고…시니어 눈칫밥 먹이는 언론사

시니어 기자 점점 늘어나는데, 언론사는 수수방관

박병수 한겨레 통일외교팀 선임기자의 하루는 오전 6시45분에 시작한다.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면 6시55분, 마을버스와 경의선을 타고 용산역에 내려 국방부 기자실에 출근하면 8시30분이다. 본격적인 하루는 그 때부터 시작이다. 통일외교팀장에 보고를 하고 브리핑이나 온라인 기사를 챙기면 어느덧 12시. 취재원과 점심을 먹고 지면용 기사를 마감하면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는 만 4년이 넘게 매일같이, 홀로 국방부에 출입하고 있다. 그 전에는 외교부에서 2년 반을, 또 그 이전에는 통일부에서 2년을 있었다. 모바일 에디터 이후 선임기자 이름을 달고 현장에 머문 시간만 벌써 9년여다.


선임기자로 현장에 있는 게 처음부터 내킬 리 없었다. 9년 전만 해도 그 역시 “팽 당했나”라는 생각에 욕을 뱉으며 출입처로 가야 했다. “언론인으로서의 출세란 자고로 편집국장을 하다 논설위원을 거쳐 사장까지 되는 것인데 데스크하다 뚝 끊겨 현장에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그는 막상 현장에 와 보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건 터지면 따라가기 벅찼던 시절보다 더 여유 있게 사안을 바라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신감도 생겼다고 했다.


물론 후배들과의 관계는 그에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예우는 해주지만 출입처 젊은 기자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고 팀원들과 오해와 갈등도 종종 생긴다고 했다. 취재원 관리보다 팀원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다. 박 기자는 “나이 들어서 예우나 특혜를 받겠다는 마음이라면 후배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다”며 “최소한 기자 한 명 몫은 해야겠다, 평기자로 일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아마 지금과 같이 경쟁도 치열하고 기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시대엔 시니어 기자가 제 몫을 해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니어 기자 비율 평균 28.5%…“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시니어 기자가 평기자와 똑같이 출입처에 출근하고 매일 기사를 쓰는 일은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사에선 낯선 일이다. 보직을 거친 시니어 기자들은 주로 논설위원실 심의실 등에 가거나 디지털·경영·수익 부서 등으로 전환 배치된다. 현장에 나가더라도 일상적인 기사를 처리하기보다 후배 기자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일부 젊은 기자들은 시니어 인력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노동시간 단축이 시행되며 인력부족 문제가 심화되는 상황, 무한정 신입 기자를 뽑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연륜 있는 시니어 기자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니어 기자가 언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자협회보가 조사에 응답한 5개 종합일간지를 들여다본 결과 시니어급 기자로 볼 수 있는 만 50세 이상 기자 비율은 평균 28.5%에 육박했다. 국민일보, 한겨레가 30% 이상이었고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등에서도 시니어 기자의 비율이 25% 이상이었다. 한국일보는 시니어 기자의 비율이 19.9%였다. 지상파 방송사도 마찬가지였다. KBS의 경우 20년차 이상 기자가 전체 기자의 45%를 차지했고 25년차 이상 기자도 전체 기자의 19% 수준이었다. SBS 역시 20년차, 25년차 이상 기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각각 39%, 15%에 달했다.


이렇게 시니어 기자가 많은 이유는 1987년 신문 등록제 전환, 서울 올림픽 특수, 신규 언론사 급증 등으로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언론사 인력이 큰 규모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채용된 기자들이 시니어 기자가 되면서 대부분의 언론사가 역 피라미드의 기형적 인력 구조를 갖게 됐고 정년 연장으로 현상이 심화됐다. 임금피크제로 특정 연령부터 임금이 깎이는 상황에서도 시니어 기자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인식이 대두되는 이유다.

 

언론사는 수수방관…“신경 쓸 여력 없다”


가장 큰 문제는 회사가 시니어 기자들에게 어떤 역할을 주어야 할지 명확한 계획이 없다는 점이다. 지상파 방송사 한 관계자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사가 시니어 기자의 직무 설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며 “보직 이후의 어떤 제도를 정비한다는 것이 쉽지 않고 잘 되지도 않는다. 선임기자 전문기자로 현장에서 활용하는 이상의 방법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실제 평기자에서 국장에 이르는 단계적 승진제도 외에 지난 20여년의 시간 동안 언론사가 만든 시니어 기자의 모델은 대기자, 선임기자, 전문기자 제도뿐이다. 그러나 이 제도들이 아직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는 시각은 팽배하다. 대기자와 선임기자는 인사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 전문기자 역시 기자 스스로 ‘단독 플레이’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지위라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린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장은 “그동안 언론사 내부에선 전문기자제로 가야 한다는 당위성만 있었고 이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는 구체적 지원 방안이 거의 없었다”며 “존중 없는 내부의 시각, 인사 철마다 휘둘리는 상황 때문에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전문기자들이 자포자기 해왔다. 전문기자의 능력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방향으로 언론사가 나아갔다”고 말했다.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도 시니어 기자에 대한 체계적 직무 설계가 없는 데 대해 “우리가 정년 연장의 선두그룹이라 지금이 과도기인 것 같다. 회사에서 준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서도 “시니어 기자라고 다 엉덩이 붙이고 싶은 건 아니다. 후배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밥값을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기사 쓰고 싶은 사람도 많고, 실제로 일주일에 한두 꼭지 쓰는 시니어 기자 중에 자괴감을 느끼는 기자들도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사의 자산은 사람이다. 경영진이 특파원 같이 돈 들여 육성한 인재들을 어떻게 쓸지 활용방안을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사, 시니어 기자 활용 위해 다양한 시도


일부 언론사에선 시니어 기자를 활용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논설위원 수를 대폭 늘려 ‘직격 인터뷰’, ‘논설위원이 간다’ 등 심층 기사를 다수 생산하고 있고 실제로 호평을 받고 있다. SBS는 지난해 12월 8명의 선임기자가 속해 있는 전략뉴스부를 만들어 보직 이후에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지만 보도제작부 인력이 급감하며 이들을 모두 현업에 투입시켰다. 심석태 SBS 보도본부장은 “인원이 적다 보니 1/n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시니어 기자들이 시사 프로 디렉팅, 프로듀싱, 편집부 데스크, 야근국장 등을 하고 있다”며 “전략뉴스부 형식을 꼭 고집하기보다 예측 가능하게 인사 관리를 해주고 장기적으로 자기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끔 조직이 미래를 제시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한겨레는 반대로 아예 선임기자 제도 자체가 사라졌다. 시니어 기자를 취재 현장으로 배치해 기사를 생산한다는 제도의 목적이 달성됐기 때문이다. 정남구 한겨레 노조위원장은 “사실상 한겨레에선 선임기자 제도 자체가 사라졌다. 만 25년차 이상이면 무조건 선임기자를 붙이지만 회사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진 않는다”며 “편집국장을 했든 부서장을 했든 보직이 끝나면 맡은 부서에서 일하고 호칭으로 예우해줄 뿐이다. 우리에게 선임기자는 필드에 있으면서 간부직을 맡지 않는 기자이고, 사실상 그냥 기자”라고 말했다.


시니어 기자를 어떻게 활용할지 방안을 고심 중인 곳들도 있다. KBS에서는 지난달 25일 정기이사회에서 시니어 인력 관리방안을 보고안건으로 올리고 시니어 인력 운용 상황을 논의했다. CBS도 지난달 30일 노사협의회에서 시니어에게 적합한 업무가 무엇일지 구체적인 내용을 조직별로 체계화하고, 이 업무를 담당하는 이를 위한 보상체계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이진성 CBS 노조위원장은 “TF를 만들어 각국별로 시니어들이 잘 할 수 있는,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업무를 찾을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뉴스 생산구조도 바꿀 것이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니어 기자 두려움 극복 위해 도움 줘야


다만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명확하다. 언론사의 체계적 직무 설계만큼이나 시니어 기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이는 기자 사회의 수직적 위계 구조를 넘어 우리 사회의 통념과 어긋나는 지점이어서다. 통신사 한 기자는 “선배들 얘길 들어보면 무시당했다는 심정적 반발도 있는 것 같고 내가 이 직급까지 됐는데 후배들과 똑같이 일을 해야 하느냐, 불이익이나 망신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시니어 기자들이 현장에서 비슷하게 일하고 또 그들을 대우하고 존중하는 조직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수 한겨레 선임기자도 “통상적으로 나이 많은 기자가 현장에 나가기 어려운 이유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두렵기도 하고 적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우리 사회의 통념 관례 가치관이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그걸 필드에 나가는 기자에게 온전히 떠넘기기보다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을지 회사 차원에서 논의의 장을 마련해주거나 재교육 실시, 가이드라인 제시 등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 시스템 안에 시니어 기자들을 끼워 넣기보다 아예 새로운 틀을 고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장은 “최근의 언론계 흐름을 보면 1인 매체의 시대다. 해당 분야에서 고도로 무장한 이들이 실제 언론 활동을 하고 있다”며 “아무리 봐도 언론사의 역할은 이러한 1인 매체를 관리하는 업체로 기능이 급격히 재편돼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20년, 25년 이상을 기자로 일했던 시니어야말로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1인 매체 시대를 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고, 회사 역시 그런 차원에서 인력을 배치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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