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 "뉴스룸마저 이토록 조용하다니"

[기자들의 삶 / 세계 언론인과의 대화] ① 핀란드

지난 4월,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대한민국의 언론자유지수는 43위로 전년보다 20계단 상승했다. ‘최순실 게이트’ 보도와 ‘촛불 혁명’을 거치며 과거 위축됐던 언론자유가 활짝 피어났지만, 정작 기자들은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기자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거나, 오히려 더 퍽퍽해졌기 때문이다. 포털을 무대로 한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광고 등 언론 산업을 지탱하던 먹거리는 점점 줄고 있다. ㅁ초과근무를 당연시해왔던 언론사들은 근무시간을 주 52시간 이내로 조정하는 것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게다가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기사를 써도 돌아오는 것은 ‘기레기’라는 비아냥거림뿐이다. 궁금했다. 다른 나라 기자들은 어떤지. 이른바 선진국 기자들은 어떤 근무 조건과 환경에서 일하고 사회적 평판은 어떠한지, 또 어떤 사명과 고민을 가지고 일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난 7월, 기자협회보 기자 3명이 각각 핀란드, 독일, 미국, 일본을 찾아 기자들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많은 차이점과 공통된 고민 속에서 우리 언론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6주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Yle 국제뉴스팀의 기자들이 업무와 관련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 37.5시간 근무, 여름휴가는 4주씩
‘교육강국’,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다. 전체 국토의 75%가 숲으로 덮여 ‘숲과 호수의 나라’로도 불린다. 자연환경은 척박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부국’이기도 하다.


국제관계 싱크탱크인 경제·평화 연구소가 지난 6월 ‘2018 세계평화지수(GPI)’를 발표했는데, 핀란드는 전 세계 163개국 가운데 15위를 차지했다.(한국은 49위) 그만큼 핀란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라’에 속한다. 지난달 2일,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윌레)를 찾았을 때에도 조용하고 여유로운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터키 한 경제지 기자가 핀란드 외국 언론인 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한 뒤 “조용한 뉴스룸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에서 국제뉴스를 담당하고 있는 미까 마껠라이넨 기자. ◇국제뉴스 기자 미까 마껠라이넨: ‘썸머잡’으로 시작, 업무는 ‘독립적’으로
헬싱키 중심가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Yle 본사. 우리의 취재를 도와준 미까 마껠라이넨 Yle 기자의 안내에 따라 국제뉴스팀이 있는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핑크색 커튼과 안락한 소파, 알록달록한 쿠션으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휴가철이어서인지 자리를 비운 기자들이 많았고, 몇몇은 일을 하다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곤 했다.


조용하고 우리에 비해 사건·사고가 많지 않은 나라여서일까. 핀란드 언론은 국제뉴스를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고, Yle 역시 그렇다. 마껠라이넨도 국제 뉴스를 담당한다.


그는 학생 시절이던 1988년 ‘썸머잡(summer job)’으로 기자 일을 시작했다. 핀란드에서는 여름 방학 등을 이용해 단기 아르바이트로 직업 체험을 하는 ‘썸머잡’이 일반화되어 있다. 몇 주씩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과 그 기간을 ‘썸머잡’으로 채우는 사람들이 일종의 공생관계를 맺는 셈이다. 마껠라이넨 역시 썸머잡을 통해 파트타임으로 기자 경험을 쌓았고, 90년부터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업무 패턴은 독립적이다. 데스크 회의나 소규모 미팅이 있지만 대개 참여하지 않고, 업무 관련 사항은 전화로 한다. 그는 국제 뉴스를 희망해서 쭉 전담하고 있는데, 다른 Yle 기자들도 자신이 일하고 싶은 부서를 선택할 수 있다. 인재 채용을 할 때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지원을 받는데, 다른 업무를 반년 정도 경험한 뒤 계속 남을지 여부를 선택하게 한다. “먼저 경험해보고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찾는 것이 고용주 입장에서도, 기자 입장에서도 안전한 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근무 시간은 주 37.5시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국제뉴스를 다루는 업무 특성상 기본 40시간 혹은 그 이상 일하는 경우가 많다. “취재 중인 게 있으면 깨어 있는 동안은 계속 신경 쓰고 일하는 셈”이다. 연봉은 다른 신문이나 MTV 같은 상업방송에 비하면 낮은 편이지만 “공영방송이라 고용이 안정적이고 다른 업무를 해볼 기회가 많다는 게 장점”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만족한다. “쓰고 싶은 스토리에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어서”다. 물론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양질의 기사를 더 빠른 시간 안에 쓰는 것”에 대한 고민도 많다. SNS에서 자신의 개인 채널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서 독자와의 접점을 확대하려는 노력이다. “그냥 기사를 써서 내보내는 것보다 SNS로 소통을 하면 독자 수도 늘릴 수 있고, 피드백을 통해 일하는 데 도움을 많이 얻는다. 독자 입장에서도 언론사를 보는 게 아니라 기자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필터링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기사를 잘 써주는 사람을 팔로잉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한 채널이 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에 체류한 적이 있고, 평양을 취재한 경험도 있다는 그는 (인터뷰 당시) 직전에 열렸던 북미정상회담과 한반도 정세 변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직접 한반도를 찾아 취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베싸 마르띠넨 기자가 헤드셋을 착용하고 인터뷰를 녹음하고 있는 모습.

◇8년차 기자 베싸 마르띠넨 “회식? 처음 들어…휴가 4주도 짧다고 하는데…”
국내뉴스팀에서 만난 베싸 마르띠넨은 8년차 젊은 기자다. 헬싱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 전반을 다루고, 주로 라디오 뉴스를 제작한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면 퇴근한다. 출근해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10시쯤 커피를 마시며 15분 정도 미팅을 가진 뒤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취재 아이템은 스스로 발제하거나, 담당 프로듀서가 정해주기도 한다.


이 날 맡은 아이템은 2개. 먼저 인근의 체육관에서 유럽 주니어(U18) 육상 선수권 대회를 준비 중인 17세의 창던지기 선수 토피아스 라이네(인터뷰 후 대회에서 동메달 획득)를 인터뷰하고 티꾸릴라 코스끼 댐으로 이동했다. 그가 직접 운전한 취재용 밴 뒷좌석에는 라디오 생중계를 위한 녹음 및 송수신 장비가 모두 갖춰져 있었다. 그가 “올드패션하다”고 하는 중계용 밴을 직접 운전해서 나온 것은 라디오 생중계 때문이다. 건설된 지 100년이 지난 작은 댐이 개조를 앞두고 보수 작업을 위해 상류 지역의 물을 방류하는 현장을 라디오 프로그램과 연결해 라이브로 전하기로 한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 마이크와 송신기를 차고 능숙하게 생중계 연결을 마친 마르띠넨은 공사 담당자와 현장을 찾은 ‘물고기 박사’ 등을 인터뷰하고 라디오 진행자와 문답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수문이 열리고, 상류의 물이 빠르게 배출되기 시작했다. 어느덧 현장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근 주민들이었다. 어떻게 알고 나왔느냐고 물으니 마르띠넨이 방금 전 라디오 생중계로 전한 댐 방류 소식을 듣고 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만큼 헬싱키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친숙한 매체였다.


보수 작업을 앞두고 방류를 시작한 티꾸릴라 코스끼 댐. 이 소식은 라디오로 생중계됐다.

핀란드에서는 이렇게 작은 댐을 방류하는 소식도 ‘뉴스가 되는지’ 물었다. 마르띠넨은 “아마 휴가철이 아니었으면 다루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면서도 “막상 와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로웠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라디오 뉴스를 주로 담당하는 그는 현장에 직접 나가서 취재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게 더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핀란드에서 경쟁은 ‘가장 빨리’가 아니라 ‘가장 잘’ 하는 것(not fast but best)을 의미한다”며 “남들이 하지 않는 아이템을 할 때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좋은 아이템을 찾기 위해 동료들과 곧잘 브레인스토밍을 하기도 하지만, 일과 개인 시간은 철저하게 구분한다. 저녁엔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고, 물론 회식도 없다. 퇴근 후엔 취미로 밴조(기타의 일종)를 연주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친구를 만난다. 물론 그것도 다 옛날 얘기다. (인터뷰 당시) 생후 5주 된 아기가 있다는 그는 “아기가 내 시간을 다 쓰고 있다” 말했다.


핀란드 직장인들은 대부분 1년에 5주를 휴가로 보낸다. 보통 여름휴가로 4주를 쓰고, 겨울 크리스마스 기간에 1주를 쉬곤 한다. 8월에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날 거라는 그에게 한국에선 보통 여름휴가를 1주일 정도 쓰고 그 이상은 ‘허락 받기 힘들다’고 말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와우~ 아임 럭키! 핀란드에선 4주도 적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야.”


헤어질 때쯤, 그에게 핀란드의 자랑하고 싶은 점이 있냐고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라며 신중하게 답을 고르던 그는 이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기회”라고 답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건 어떤 사람이건, 총리도, 정치인도 될 수 있고, 다른 나라에 비해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행복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많은 걸 느끼게 해준 인터뷰였다. 고맙다.”


핀란드=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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