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평화 촉진 외교가 전개되고 있지만, 한국 정부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하고 있다. 중재자, 촉진자, 당사자 등등의 용어가 나오고 있는데, 이들 용어는 일반적인 의미도 표현하고 있지만, 지난 30년 동안 북핵 문제 역사에서 축적된 맥락도 담고 있다.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이 채택되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 당사국은 남과 북이었다. 1993년 3월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당시 김영삼 정부가 ‘핵을 가진 자와 대화할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변화가 발생했다. 당시 미국 정부가 NPT 질서 붕괴 가능성을 우려해 한국 정부를 제치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것이다. 결국 북핵 문제 당사국은 북한과 미국으로 전환됐다.
북핵 문제는 2002년 10월 제2차 북핵 위기를 계기로 남, 북, 미, 중, 일, 러가 참여하는 6자회담 시대로 전환했다. 6자회담은 실질적으로 북한과 미국이 당사국이고, 중국은 중재자, 한국은 촉진자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6자회담 시대는 2008년 2월 한국에서 이명박 정부, 2009년 1월 미국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서, 대북 강경 정책을 전개하고, 북한이 도발적 조치로 맞대응하면서 종식됐다. 북핵 문제 대응은 결국 유엔 안보리로 넘어갔고, 사실상 방치됐다. 한국 정부 역할은 유엔 회원국 차원으로 축소됐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대화로 변경하면서 한국은 다시 북핵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북핵 문제 당사자는 여전히 북한과 미국이고, 중국은 북핵 문제 논의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 중재자와 촉진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과 달리 미국과 동맹이고, 북한과는 동족이다. 어느 쪽의 편도 아니라는 의미가 전제돼 있는 중재자를 자처하면 양쪽에서 불신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촉진자 역할에는 문제가 없지만,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을 굳이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외교 환경을 불필요하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소소한 용어 사용을 놓고 과도하게 반응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외교 협상을 하면서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휘발유 엔진 차량에 경유를 주입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균형자론’을 제기했다가 불필요하게 미국 쪽 반발을 초래한 경험도 있다.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는 논의를 종식시키는 것이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 촉진 외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