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꾸는 길에 동반자가 되어달라"... 고 이용마 기자가 남긴 것들

말과 사진으로 돌아본 이용마 MBC 기자의 길

이용마 MBC 기자가 별세했다. 향년 50세. 사람이 떠난 자리엔 뭔가 남는다. 그는 무엇을 남기고 떠났을까. 기자협회보는 공정방송을 위해 헌신한 고 이용마 기자의 말과 사진을 통해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기자협회보 기사를 통해 당시 배경에 대한 설명도 더했다.

남은 자의 몫은 항상 클 수밖에 없다. 함께 짐을 짊어졌던, 어쩌면 더 많은 몫을 짊어졌던 그 사람 없이 남은 세상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난 자리가 유난히 커보인다. 남은 자의 윤리는 더 많은 고민과 분투 뿐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번 파업은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투쟁...MBC와 MBC노조의 명운을 걸었다. 김재철 사장이 퇴진하고 이를 통해 MBC 공정성을 회복할 때까지 파업은 끝나지 않을 것”
- 고 이용마 MBC 기자는 2012년 1월30일 김재철 사장 퇴진 등을 목표로 한 파업 출정식에서 이 같이 말했다. 당시 MBC노조 파업은 이명박 정권 들어서만 다섯 번째, 김재철 사장 퇴진을 내건 파업으로선 2010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언론노조 MBC본부 홍보국장을 맡았던 이 기자의 발언은 해당 파업엔 퇴로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MBC는 김재철 사장 이후에도 안광한, 김장겸 등 두 명의 사장을 더 거치고서야 정상화를 맞을 수 있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여의도 방송센터 1층 민주의 터에서 파업 출정식을 연 300여명 MBC노조 조합원의 모습들. 위 사진 가장 오른쪽, 카메라를 든 사람 바로 왼쪽에 구호를 외치는 이 기자가 보인다. 아래 사진은 2012년 3월12일 오전 서울 청운동 주민자치센터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낙하산 김재철 투입 청와대 해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이 기자(MBC 노조 홍보국장)이 성명서를 낭독하는 모습.



“회사가 망가지든 말든 무조건 노조만 이기겠다는 생각만하고 있는 경영진이 문제”
- 이용마 기자는 2012년 3월20일 해고됐다.  사측은 파업의 도화선이 된 기자들의 제작거부 등 주도 혐의를 이 기자에게 적용했다. 제작거부 배후에 노조가 있었고 이를 진두지휘한 것이 이 기자라는 주장이었다.

김재철 MBC 사장은 노조 지도부를 형사 고발해 구속까지 시키려 했다. 2012년 5월21일 MBC 노조 집행부 5명은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도 했다. (위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용마 기자) 검찰은 업무방해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무리한 영장청구를 한 검찰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해직 후에도 이 기자는 여러 방송 등에 출연해 MBC의 현실과 파업 정당성을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아래 사진) 2012년 4월 한국일보 팟캐스트에 출연(왼쪽)한 이 기자는 “재작년 파업 실패 이후 조합원들의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는데 이번에 마저 이런 식으로 패배한다면 이건 안 된다는 의지가 강하다”며 위 발언을 전했다.

다소 늦깎이로 노조 집행부에 입성한 이 기자는 당시 1년여 기간 노조 홍보국장으로 일하며 김재철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을 철저히 감시해왔다. 파업 국면에선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기획하고 김재철 사장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폭로하며 사측의 표적이 됐다.



“설을 앞두고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 2012년 1월 시작된 170일 파업은 같은 해 7월17일 업무복귀로 마무리됐다. 이후 파업참여 조합원들은 '신천교육대'에 보내지고, 비제작부서로 발령이 나는 등 여러 고초를 겪었다. 이용마 기자를 포함한 해직기자들은 파업의 정당성과 해고의 부당함을 두고 사측과 다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2014년 1월17일, 법원은 2년 전 노조 파업이 정당했으며 해고는 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날 이 기자는 위 인용과 같이 기쁨을 표현하며 “다른 것보다 우리 파업의 정당성이 인정받았다는 게 대단한 성과”라고 평했다.

그는 “(판결에 대해) 기대는 하고 싶었지만 자신은 없었다.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우리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오늘 법정에도 나가지 않았다”면서 “설사 이긴다 해도 파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징계가 과하다는 정도를 예상했는데 아주 정확하게 우리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줘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판결 전까지만 해도 해직자 6명 중 몇 명이 구제를 받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지만 법원은 모두가 놀란, 너무나도 상식적인 결과를 내놨다. 당시 판결 요지는 아래와 같다.

“일반 기업과 다른 방송사 등 언론매체의 경우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인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올바른 여론의 형성을 위하여 방송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 … 따라서 방송사에 있어서 공정방송 의무는 노사 양측에 요구되는 의무임과 동시에 위 공정성의 보장 요구는 근로관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근로조건에 해당한다.

… MBC노조가 이 사건 파업에 이르게 된 주된 목적은 특정 경영자를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고 MBC의 경영진이 단체협약에 정한 공정방송협의회 등을 제대로 개최하지 않고 프로그램의 제작진을 인사원칙에 반하여 임의로 교체하는 등 방송의 공정성 보장을 위한 여러 절차적 규정들을 위반하고 인사권을 남용하는 방법으로 방송의 공정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경영진에 대하여 방송의 공정성을 보장받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

사진은 1월17일 해고 등의 징계가 무효라는 법원 판결 직후 서울 여의도 MBC 남문 앞에서 열린 자축의 자리에서 해직자들이 소감을 말하는 모습. 왼쪽부터 (당시 직함) 최승호 해직PD, 박성호 해직기자, 강지웅 전 MBC노조 사무처장, 정영하 전 MBC노조 위원장, 이용마 전 MBC노조 홍보국장.



“기자나 언론인들은 모두 양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자기 양심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을까. 또 그 상황에 부닥치면 파업을 선택할 것이다.”
- 이용마 기자는 2014년 11월 해직 1000일을 앞둔 상황에서 기자협회보와 인터뷰 중 2012년 파업을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이 같이 답했다. 앞선 판결 후 법원은 해직기자들을 복직시키라는 판결 등을 내렸지만 MBC는 사실상 이를 거부했다. 회사는 그를 포함해 해직 언론인 6명을 인사발령이나 업무지시도 내리지 않고 일산드림센터 201호에 가뒀다.

이 기자는 당시 MBC 경영진에 대해 "한마디로 무도한 사람들이다. 인간적 예의가 없고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며 "경영진이 MBC를 상업망송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수준미달의 천박한 상업방송"이라 비판했다.

당시 기자협회보 인터뷰에는 처음 해고통보를 받던 상황과 심경도 포함됐다. 기자협회보는 2014년 11월24일 보도에서 "오랜만에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았다. 밥숟갈을 막 들려고 할 때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재심결과, 해고 확정.’ 홀로 사시는 어머니한테 어렵게 ‘해고’라는 말을 꺼냈다. 어머니의 한마디는 이랬다. '나는 우리 아들을 믿는다.' 아랫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2012년 3월20일의 저녁밥상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라고 적었다.

인터뷰에는 해고 직후 무력감에 힘들어하던 이 기자의 마음도 담겼다. 그는 당시 일산드림센터 201호로 출근하면서 틈틈이 서울대와 건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를 했다. “할 일이 없고, 갈 곳도 없어 집에서 종일 빈둥거렸다. 1~2주 지내니 어느 순간부터 멍해지더라. ‘이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러다가는 폐인이 될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대학 도서관으로 갔다. 수료하고 10년째 쓰지 못한 박사 논문을 쓰면서 고비를 넘겼다.”

위 사진은 2014년 5월27일,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전 집행부가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를 선도받고 웃는 모습. (왼쪽부터 당시 직함으로)정영하 전 위원장, 이용마 전 홍보국장, 신인수 변호사, 강지웅 전 사무처장, 김민식 전 편성제작부위원장, 장재훈 전 정책교섭국장. 아래 사진은 2014년 11월 인터뷰 당시 이 기자 모습.



“언론인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정직’이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서 허위 보도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에 MBC에서 분명히 지켜왔던 원칙이 무너졌기에 우리는 파업을 했다. 이번 재판은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문제다.”
- 이용마 기자는 지난 2015년 3월19일 MBC 파업으로 인한 업무방해혐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이 같이 밝혔다. 공정방송을 되찾고자 했던 이 기자의 소신이 잘 드러나는 발언이다.

이 기자를 비롯한 해직기자들은 사측과 법정싸움을 수 년 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법원은 번번이 해직기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2015년 4월 29일 서울고등법원은 2012년 170일 파업과정에서 해고된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항소심에서도 징계재량권 남용이라며 MBC의 항소를 기각했다.

해직기자 동료들과 함께 법원에 출석(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한 이 기자는 당시 "2012년 MBC 파업은 언론을 장악하려는 정권과 경영진에 대한 정당한 싸움이었다고 법원이 인정했다”면서 “이제 정권 차원에서 분명히 사과하고,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데 검찰총장과 공영방송 사장을 왜 국민이 못 뽑나. 우리 민주주의 제도를 좀 더 확대해 공영방송 사장과 검찰총장을 뽑는 과정마다 아래로부터 감시 제도를 만들고 아래로부터 권력기관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아갈 길”

- 2016년 9월, 언론보도를 통해 이용마 기자의 암투병 소식이 전해진다. 해직된 지 4년6개월, 그간 마음에 쌓인 화와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란 원망과 안타까움의 말이 언론계를 떠돌았다.

복막암 투병 중에도 이 기자는 공영방송의 가치를 강조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 기자는 2017년 3월11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위 사진)해 “검찰총장과 공영언론사 사장의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근혜 게이트는 언론에서 출발했고 특검을 통해 진실을 일부나마 밝혀낼 수 있었다. 검찰과 언론이 바로 서면 재벌·관료·기업·노동 문제 등 모든 사회적 적폐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자는 병으로 자신이 조명받는 현실마저 공영방송 정상화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복막암 판정을 받은 이 기자를 2016년 말, 2019년 초 두 차례 방문했고 이 기자는 그때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 의견을 전했다.(아래 사진) 암투병 사실이 알려지고 첫 공식행사를 가진 그해 2016년 12월 이 기자는 “처음에는 인터뷰 안하려고 했는데 이 시국 속에서 언론인들을 위해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면서 "내년에는 망가져있는 공영방송의 정상화와 함께 건강도 회복해서 돌아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해고되던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복직을 의심해본 적 없었는데도, 막상 현실이 되니까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것 같다”

- 끝나지 않은 것 같았던 긴 해직기간은 2017년 12월11일 마침내 끝났다. 이용마 기자와 해직기자들은 이날 오전 서울 상암동 MBC광장 앞 600여명의 MBC구성원들이 모인 가운데 복직했다.

이 기자는 후배가 전달해 준 MBC 사원증을 목에 걸며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나와 주신 촛불 시민의 위대한 심정을 잊지 말아 달라. 그동안 사회적 약자의 억울한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분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주변도 돌아봐 달라. 1년 이상 길거리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바로 옆에 있다. 집합적 지혜라는 게 뭔가 공동체 의식을 통해 보여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기자의 이날 출근은 복직 후 첫 출근이자 마지막 출근이 됐다. 



“갈 길이 먼 거 같다. 그 모든 일들이 사실 우리가 해야될 과제로 남아있다...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사회,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꿈꿔본다.”
- 이용마 기자는 암투병 후 외부 행사를 참석할 때마다 가족과 동행했다. 제5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 기자는 2017년 12월1일 앰뷸런스로 후송돼 가족과 함께 행사장을 찾았다.(위 사진) 동기인 김민식PD가 미는 휠체어를 탄 채 장내를 가로지르는 동안 150여명의 선후배, 동료, 관계자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쾌차를 바라는 '파이팅'을 외쳤다. 눈물을 흘렸다.

이 기자는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오른 단상에서 “리영희 선생은 사상의 은사이자 언론인, 지성인의 표상이시다. 제가 가장 존경했던 동시대인 중 한분이시기도 하다. 그런 분의 상을 받게 됐으니 저로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 기자는 또 “제가 오늘 어렵게 나온 또 다른 이유는 제 어린 아이들 현재, 경재를 위해서다. 아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며 "저랑 함께 상을 받았고, 꽃다발까지 받았으니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고 했다.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인 바람도 이 기자는 드러냈다. 그는 “저는 제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 자기들이 즐기는 일을 하면서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았으며 좋겠다. 이게 지금 제 바람”이라며 “안타깝게도 아직 그런 사회가 되기에는 갈 길이 먼 것 같다. 그 모든 일들이 사실 우리가 해야 될 과제로 남아있는 거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사회,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꿈꿔본다”고 했다.

기자협회보와 이 기자가 마지막으로 가진 2017년 11월7일자 인터뷰 보도에서 이용마 기자는 "세상을 바꾸는 길에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기자가 우리에게 건넨 마지막 바람일지도 모를 말이다. 해당 기사(<이용마의 낮은 목소리 "세상을 바꾸는 길에 동반자가 되어달라">)에는 이 기자의 기자 시절 중 몇몇 순간들, 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병색이 완연한 모습까지, 여러 사진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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