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인 기자가 내게 물었다 "두유 노우 봉준호?"

[아카데미 시상식 취재기] 홍석우 KBS 기자

“선배의 나비넥타이 방송이 지금 한국에서 화제래요.”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식을 생방송 속보로 전하고 난 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 한국에선 신기한 광경이었나 보다. 그런데, 보타이(나비넥타이)는 그냥 교복 같은 개념이다.


아카데미 측은 복장 규정만 적어놓은 이메일을 두 차례나 보냈다. “지키지 않으면 돌려보낼 권리가 있다”는 문구를 특히 강조했다. 남자의 경우 복장은 ‘턱시도’와 ‘다크 엘레강스 수트’로 명시하고, 신발은 까만색 스니커즈도 안 된다는 깨알 규정이다.   


모 한국 기자는 지레 긴장해 드레스를 입고 취재 허가증을 발급받으러 갔다는 일화도 전해졌다. 미국 기자들은 저마다 멋진 턱시도와 아찔한 킬힐에 화려한 롱드레스로 한껏 멋을 내고 방송을 한다. 하지만 복장 규정에 ‘엘레강스’는 주관적인 개념이니까 남녀 모두 짙은 정장이면 무난하다.


아카데미 취재 허가증(credential) 신청은 시상식 3개월 전쯤에 마감된다. 수상이 유력해진 시점에서 허가증 없이 취재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봉쇄된 시상식장 주변에 보이는 건 거대한 장벽과 가림막, 우람한 미국 순찰차뿐. 현지에서도 기생충은 유명 영화니까 시민 반응은 다양하게 확보할 수 있는 정도다.



아카데미 측은 23페이지 분량의 미디어 가이드북에서 시상식을 ‘격식 있는 사적인 행사’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사적인 행사’는 언론사 간에 차별도 대놓고 한다. 우선 허가증 신청자의 70%를 탈락시킨다. 상위 30%가 됐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내가 볼 수 있는 광경이 저택의 통유리창인지 반지하방인지를 알아야 한다. 레드카펫에 자체 무대를 설치할 수 있는 허가면 상위 1%, 레드카펫을 돌아다니며 후보들을 만나 인터뷰 할 수 있으면 상위 3% 정도 된다.


국제영화상 후보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는 몇몇 언론사만 초청을 받았다. 가보니 카메라 자리를 미리 정해 놨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외신 서열 순이다. 이날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를 고사했다. 현장에 있던 제작사 관계자는 “감독님이 특정 한국 언론들과만 미리 인터뷰하면 난감해진다”라고 전했다.          


주최 측과 후보들의 ‘사적인 모임’은 비공개로 곳곳에서 계속됐다. 그중에 하나를 알아내 서성이고 있었더니 주최 측 관계자가 추운데 왜 거기 있냐며 안에 들어오라는 게 아닌가? 들어오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기자셨어요?” 양복에 보타이를 하고 있으니 한국영화 관계자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단편 다큐 후보작인 ‘부재의 기억’의 이승준 감독도 시상식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아카데미가 가장 복장을 따지고, 미디어 접근 불가 행사가 많았다고 말한다. 부재의 기억은 2014년 세월호 참사부터 촛불집회까지 과정을 당시 현장 영상과 교신 녹취 등을 활용해 재구성한 29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다. 국제다큐멘터리협회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작을 종일 상영하는 행사에서 이승준 감독을 만났다.


이승준 감독과 감병석 프로듀서는 자신들의 배우자 몫인 시상식 참석 권리를 단원고 학생들의 어머니인 오현주, 김미나씨에게 양보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렇게 레드카펫을 밟게 됐다는 리포트를 제작했고, 지금 돌아봐도 출장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취재였던 것 같다.


기생충의 현지 분위기는 뜨거웠다. 칸은 영화에 조예가 깊은 심사위원 9명이 황금종려상 작품을 고르지만, 아카데미는 영화인들인 회원 8000여명의 투표로 각 부문 수상자가 결정된다. 그만큼 대중들의 분위기가 중요한데, 우리가 물을 법한 “두유 노우 기생충?”을 외국인들이 우리한테 묻는 분위기라고 보면 된다. 한국영화 첫 아카데미 수상인 각본상 수상 직후엔 옆에서 방송하던 호주인 기자가 느닷없이 “두유 노우 봉준호?” 하면서 이것저것 나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5박의 출장에 <뉴스9> 4번, 오전 뉴스 7~8번의 연결이었다. 현지시간으로 오전 기획 취재를 시작으로 오후엔 뉴스 연결, 늦은 밤엔 <뉴스9> 제작을 하다 보니 사흘 동안 새벽 5시까지 근무가 이어졌다. 체력적 부담에다 큰 행사인데 취재 제한이 너무 많다는 심적 부담까지 이어졌다. 19년 기자생활에 9년가량 사회부를 했지만, 어떤 면에선 눈앞에서 실탄이 발사되던 홍콩 시위 취재 때보다 힘들었던 것 같다.  


20kg에 가까운 생방송 장비를 들고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 정도를 옮겨 다니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시상식 당일엔 LA에 흔치 않다는 장대비까지 내렸다. 빗속 생방송 준비 중에 보안요원은 제지하고, 약물 중독인 것 같은 노숙자가 시비를 걸거나 옆에서 “바이러스 중국인 꺼져”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 미국생활을 경험한 촬영기자 박진경 선배의 현지 융통성이 아니었다면 꽤 어려웠을 상황이 많았다.           


이게 다 발전된 생방송 장비 탓이다. 예전 같으면 인터뷰룸에 앉아서 호아킨 피닉스나 르네 젤위거의 수상 소감을 즐길 여유가 있었을 텐데… 그래도 역사의 순간에 현장에 있었다는 게 어딘가? 방긋 웃으며 기생충의 각본상 수상 소식부터 생방송 스타트!


홍석우 K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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