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웬일로 이리 좋은 기사를?” “KBS 안 본 지 오래인데 정독하고 읽었습니다.”
모처럼(?) KBS 기사 댓글란이 ‘선플’로 도배됐다. ‘수신료의 가치’를 느꼈다며, 기자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익히 보고 들었을 폐지수집 노인을 취재한 기사였다. 그런데 반응이 뜨거웠다. 무엇이 달랐던 걸까. 이 기사의 무엇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미담’ 보도자료 받고 소리 지른 이유
시작은 지난해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 북구청에서 보내온 보도자료 하나가 시선을 붙잡았다. ‘다가오는 추운 겨울날,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폐지 주우시길 바랍니다.’ 구청이 한 봉사단체로부터 리어카 4대를 기부받아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전달했다는 ‘훈훈한’ 소식이었다. 분명 미담(美談)이라고 보내온 자료일 텐데, 그걸 읽는 기자 입에선 ‘악’ 소리가 나왔다. 폐지 줍는 노인들의 복지를 개선할 생각은 않고, 새 리어카로 건강하게 폐지를 주우라니? 막연히 관심만 가져왔던 폐지 줍는 노인들 문제를 다뤄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12월 어느 날, KBS 대구방송총국 보도국. 입사 3년차의 박진영 기자는 사건팀 캡인 김도훈 기자에게 ‘대담한’ 요구를 한다. “폐지 줍는 노인 기획을 하고 싶으니 데일리 리포트는 1주일에 1개 정도만 하게 해 주십시오.” 지역국 인력 사정이야 빤했지만,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대신 이왕 하는 기획이니 제대로 하라고 했다. 가난한 노인들이 어렵게 일하는 모습을 누가 보고 싶어 할까? 하지만 중요한 문제인 만큼 많이 볼 수 있게 하라는 미션이었다.
그래서 떠올린 게 GPS였다. 폐지수집 노동에 대해 정부 차원의 실태 조사가 단 한 번도 없던 터에 이를 실증하는 자료로써 GPS를 활용하는 게 의미 있다며,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도 선뜻 협조에 나섰다. 그렇게 한 달 동안, GPS 추적장치를 단 노인 10명이 주 6일씩 폐지를 모으며 이동한 정보가 60개의 GPS 지도에 담겼다. 노인 1명은 하루 평균 11시간20분씩, 13km를 넘게 걸었고, 만원 조금 넘게 벌었다. 시급으로 환산하면 평균 948원. 올해 최저시급(9160원)의 10분의 1 수준이다. 노인 몇몇을 인터뷰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데이터였다.
“실태 알리는 것만으론 안 돼…꼭 해결하고 싶었다”
리어카에 GPS 하나 달았을 뿐인데…가 전부는 아니었다. “백재민 영상기자와 취재를 나가면서 매일 같이 얘기했어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실태를 알려서 이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면 좋겠다고요.” 그는 연구 자료를 들고 국회로 갔다.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 회의록 3년 치를 뒤져 폐지수집 노인 문제에 관심 있는 국회의원들을 찾아내고 자료를 전달한 뒤, 입법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기사로 ‘박제’했다.
일련의 과정은 지난달 21일 KBS대구 ‘뉴스7’에서 방송된 2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연속 리포트와 디지털 기사로 보도됐다. 26일엔 박 기자가 직접 ‘뉴스9’에 출연해 앵커와 대담하며 보도의 취지를 알렸다. 그리고 최근 순환근무 차 안동방송국으로 발령받은 그는 5월 KBS ‘시사기획 창’을 통해 이 문제를 더 깊게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다. 그즈음 노인인력개발원의 보고서도 나올 예정이다.
이번 연구와 보도는 폐지수집 노동의 공적 가치를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아파트에선 폐지가 분리수거 되어 재활용 업체로 보내지지만, 일반 주택가에 배출된 폐지들은 그대로 방치되거나 쓰레기가 된다. 폐지수집 노동이 환경 미화는 물론 그냥 버려질 수 있는 자원을 재활용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박 기자가 폐지수집 노인들에 대한 시혜적·온정적 지원이 아닌 사회적 노동가치를 인정한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보도 이후 쏟아진 호응과 관심에 “감사한 한편 민망하다”면서도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 나서는 것 또한 폐지수집 노인의 처우를 개선하고 노인 빈곤 문제를 꼭 해결하고픈 ‘진심’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노인이 되고, 그 인생의 경로 가운데 사소한 계기로 가난해질 수 있다.” 그가 기사에 쓴 문장이다. 노인 문제는 결국 ‘우리’ 문제인 것이다.
“디지털 기사를 쓰면서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실까?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거든요. 잘못 생각했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구나, 확실히 느꼈어요. 이런 분들의 기사를 좀 더 관심을 끌만한 도구를 만들어서 더 많이 써야겠다 생각한 계기가 됐습니다. KBS 기자로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보호하는 기사를 많이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