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소인 3호선 정발산역 근처 카페에 들어서 서성대다 알바생에게 물었다. “매일 오후에 들러 커피 마시는 노신사분을 뵙기로 했는데…. 주로 어디에 앉으세요?” 익히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 에스프레소 드시는 분요~ 저쪽이요.” 그렇게 물었던 이유는 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이 매일 오후에 혼자 커피를 마시며 회상에 젖는 자리에서 감히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가방에서 인터뷰 자료를 주섬주섬 꺼내놓고 창문 밖 풍경을 보려는데 선생이 환하게 오셨다.
김병익 선생은 글쓰기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기자가 돼서 기사를 쓰고 평론가란 이름으로 문학을 비평하고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 생애 전체에 걸쳐 글과 글 사이를 찾아다녔다. 선생은 스스로 ‘하찮은 글쟁이’라고 불렀지만, “세상을 글로 개찰하며 사람과 삶, 세계와 세상의 움직임들에 말거리를 이어왔다.” 생애 동안 식민과 분단, 전쟁과 혁명, 빈곤과 혼란의 시대를 거쳐 민주화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대전환을 목격했으며, 늘 기자적 관점에서 세상을 관찰하고 사유하며 기록해온 지식인이다.
그는 유신 독재 시절인 197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언론계로 번질 때 기자협회장을 역임했으며 계간 ‘문학과지성’ 동인으로 참여했고 1975년 12월 문학과지성사를 창립해 25년 동안 대표로 재직하다 2000년 퇴임한 뒤 상임고문으로 있다. 비평집과 산문집, 번역서 등 4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2013년 3월부터 10년째 한겨레신문에 두 달에 한 번, 15매 분량의 ‘김병익 칼럼’을 연재하며 “이편의 한계를 벗어나 ‘저편’의 의식을 열어보려”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7월25일 에스프레소 트리플 샷을 주문한 선생과 마주 앉았다.
많은 분들한테 빚진 나의 삶
-여기서 커피 마시는 게 “내 노후의 조용한 사치”라고 하셨어요.
“매일 점심 후에 여기 와서 1시간 정도 앉아 회상에 젖는 거죠. 덧없는 시간들, 이제 앞날은 얼마 없고 지난날만 잔뜩 쌓여 있으니까. 여기 앉아 광장이며 거리를 내다보는 것이 하루의 낙이고 그렇게 되니까 참 단순해지고, 좋아지고 그래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서 옛날 내가 아는 누구를 떠올리고, 노후를 이렇게 보낼 수 있어 다행스럽기도 하고, 많은 분들한테 빚지고 살았어요.”
-책은 꾸준히 보고 계시죠?
“보긴 보는데 읽으면 바로 잊어버려요. 시간을 좀 덜 허망하게 보내려고 책을 보기 때문에 기억을 한다든가 또는 그 책에 의거하여 실천한다든가 그러지 못하고요. 그냥 읽고 시간 보내는 거죠.”
-신간, 특히 과학기술 관련 책들을 많이 보시죠?
“젊었을 때는 문학, 인문학, 역사책을 읽었는데 요즘은 전기나 과학사를 주로 읽어요. 정치나 현대문화나 문명에 관한 책은 사건에 대한 추적이 많지만, 과학사나 전기는 사실에 대한 추구가 많으니까요. 좀 더 뭐랄까 믿을 수 있다고 그럴까요. 사람들 이야기는 그냥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거니까. 사유나 평가나 그런 걸 열어 놓는다고 그럴까요. 자유롭게, 편하게 읽는 거죠(웃음). 그런데 아까 여기 나오기 전에 질문지를 봤어요. 젊었을 때 글까지 찾아보고 저에 대해 많이 조사해서 깜짝 놀라 제 못난 정체가 다 들켰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의 삶이 해변이라면 제 질문은 모래 한 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득 천관우 선생님이 생각나데요. 아시죠? 질문서에 ‘존경하는 분이 누가 있냐’고 있던데, 문단에선 황순원 선생님이고 언론계에서는 천관우 선생님이죠. 제가 동아일보에 입사할 때 편집국장 하시다가 견습기자에서 정기자가 될 때 주필이셨죠. 천 선생은 당대 언론계 거물로 사표로 삼을 만한 분이었죠. 불의나 독재의 억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셨고, 안목도 높으셨고, 뛰어난 사학자이셨죠. 90년대 초에 작고하셨는데, 민주화하고 혹은 전자화하는 세상을 누리지 못하고 가셨어요. 위화감이랄까요. 두려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걸 느끼는 분인데, 어려운 시절에 그분답게 사신 거죠. 생각이 문뜩 나고 그분이 저한테 써준 글이 하나 있어요. 거실에 걸어놓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소요일세지상, 그거 아닌가요?
“네 맞아요. 소요일세지상(逍遙一世之上) 비예천지지간(睥睨天地之間). 이 세상을 소요하면서 천지를 비예한다. 비예(睥睨)는 어려운 한자죠. 그래서 저도 여쭤보고 사전도 찾아봤는데, 이렇게 넌지시 내려다보는 그런 태도. 내려본다는 게 동정하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죠.” 이 친필은 1975년 6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활동 경비를 돕기 위해 마련한 바자회에 글씨를 청하러 간 그에게 천관우 선생이 여벌로 준 선물이었다.
-문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게 친구인 황동규 시인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황동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로 유명한 문학소년이었고, 저는 시골 고등학교 우등생 정도 수준이었어요(웃음). 대학(1957년 서울대 정치학과 입학) 들어가서 황동규를 보게 됐고, 그가 1학년 늦가을에 시단으로 데뷔했을 때 충격이었죠. 시인이란 존재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하다고 그럴까. 친구에게 황동규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해서 만났어요. 황동규가 그때 참 격의가 없고 열려 있었어요. 스스럼없이 나를 친구로 대해주더군요. 황동규 집에 놀러 가고 여행도 같이 다니며 자주 어울렸죠. 그 우정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나도 문단에 참여해서 명색이 문학비평가라는 이름으로 비평 활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문인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죠.”
기자로 일하며 ‘문학과지성’ 편집동인 활동
-이른바 ‘문지 4K(김병익·김현·김치수·김주연)’를 주축으로 계간지 ‘문학과지성’을 창간하셨죠?
“1970년 7월 초 서울에서 국제 펜(pen) 대회가 열릴 때였어요. 젊은 비평가 김현이 찾아와 계간지를 내자고 제안했어요.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를 하면서 김현을 사귀었는데, 저보다 3년 아래였어요. 김현은 문학적인 센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문단이나 문학 활동에 대해서도 대단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김현은 문학 계간지를 생각했고, 저는 교양지, 언론매체 쪽으로 생각했거든요.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서로 조정해 나갈 수 있고 그래서 계간지 간행에 동의했죠. 원고료 등 잡지 경비는 중·고등학교 동창인 황인철(1940~1993) 변호사가 냈고, 나와 김현(1940~1993), 김치수(1940~2014)는 기획과 편집을 하고(1971년 유학에서 돌아온 김주연 영입) 잡지 간행은 일조각에서 했어요.”
동인들은 처음에 잡지 제호를 ‘현대비평’으로 하고 문공부에 잡지 등록을 신청했다. 하지만 비판, 비평이란 단어를 싫어한 문공부가 제호 수정을 요구해왔다. 김현이 문득 “그럼 문학과지성은 어때?”라고 제안했고 동인들은 동의했다. 그렇게 ‘문학과지성’ 창간호는 1970년 9월 첫선을 보였다. 당시 김병익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5년차였다.
-기자가 아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왜 기자를 하셨어요?
“제가 대학 졸업할 때는 그 분야 출신만 입사 원서를 낼 수 있었어요. 은행에 취업하려면 상대를 나온다든가 하는 식이었죠. 정치학과 졸업생이 원서를 낼 수 있는 곳은 언론사가 유일했어요. 제대 말년에 원서를 냈는데, 한국일보, 조선일보 시험 봤다가 떨어졌어요(웃음). 세 번째 치른 데가 동아일보였죠. 신문사에 들어갔지만 언론 등에 대해 무지했어요. 동아일보가 역사가 오래됐고, 영향력이 크다는 걸 몰랐어요. 동아일보에 들어간 것은 참 행운이었죠.”
-주로 문화부에서 일하셨네요?
“견습 마치고 처음엔 외신부 기자로 발령이 났어요. 며칠 안 돼 문화부로 발령받아 10년 동안 일했죠. 바로 위가 5~6년 차 선배라 웬만한 기삿거리는 제가 취재했어요. 담당자가 없던 문학, 학술, 출판 쪽을 맡았어요. 그때 문화면은 외부 기고가 대부분이었고, 기사는 행사 소개하는 정도였어요. 저는 취재해서 기사를 썼죠. 새로운 도서 기획이나 출판계 동향을 포착해서 기사화하거나 창작의 새로운 경향을 추적하고 작가들의 작품 성과를 논평 보도하는 연재 기사를 열심히 썼어요. 아마 그건 보이지 않는 큰 기여였을 거예요. 근년에 생각하니까 제법 일을 했다 싶은 거예요.”
-지금의 문화부 기자 영역을 개척하신 거네요.
“학술이든 문학이든 동향과 흐름, 현상과 의미 부여 그런 것들을 기사로 쓴 거죠. 소문으로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다른 신문 문화면은 그냥 넘어가는데 동아일보 문화면은 제목이라도 본다고 했어요. 제가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기술적으로 썼거든요. 정부를 비판한 기사가 분명하지만 꼬투리가 안 잡히도록 문장을 만들었어요. 검열 피하는 방법이랄까요. 제게는 검열 수위를 피할 수 있는 테크닉이 발달해 있었던 거죠.”
김병익의 책 ‘지성과 반지성’(1974) 서평에서 최정호 교수는 문화부 기자 김병익을 이렇게 평했다. “기자로서의 김병익은 한국 신문의 문화면에 새 기원을 그었다. 종래의 우리나라 신문 문화면이 문화인이나 문화 행사 또는 문화인들의 투고의 ‘사회자’ 구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김병익은 문단, 학계를 스스로 ‘취재’하여 ‘보도’하고 나섰다. 그는 문화면의 ‘편집자’가 아니라 문화면의 ‘사건 기자’로서 선편을 친 것이다.”
출마 포기 거부하고 기자협회장 출마
-1974년 10월 제12대 한국기자협회장에 선출됐습니다.
“당시 기자협회장이 내무부 대변인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아 회원들의 반발이 커지자 그만뒀어요. 주요 신문사 기자들의 소장파 핵심 세력들이 기자협회를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합의한 모양이었어요. 동아일보 후배인 이부영씨가 저를 찾아와 기자협회장에 나서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어요. 그때 저는 기자협회의 성격과 구성을 잘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나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의 열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을뿐더러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자협회장 출마에 동의했죠. 그런데 회사에서 회장 출마를 포기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후배들과 약속도 했고 기자가 기자협회장을 할 수 없다는 게 이상한 일 아니냐며 만류를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사규 위반으로 무기정직 처분을 내리더군요.”
김병익은 1974년 10월19일 열린 기자협회 운영위에서 제12대 기자협회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기협이 개인적 야심이나 사적 이득을 위해 악용되어선 안 되며 또 정치단체화하거나 경제적 예속물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우리는 捨石(사석)이며 이 버림돌이 쌓여질 때 버림돌이 든든하고 높이 쌓여지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밝혔다.
회장으로 재직하던 6개월 사이 미증유의 일들이 일어났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시작으로 언론자유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전국 언론사로 번졌고, 동아일보 광고중단 사태를 거쳐 이듬해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의 대량 해직 사태가 일어났다. 조선일보가 기자 5명을 파면한 사태의 실상을 알린 증면호 발행을 이유로 기자협회보는 폐간당했다.
-12·13대 회장을 역임했지만 재임 기간은 6개월(74년 10월 12대 회장 당선, 75년 3월 13대 회장 재선, 4월29일 사퇴)에 불과했습니다.
“언론에 대한 억압이나 핍박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었고 기자협회는 그에 정면으로 대항했죠. 기자협회 60년 역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언론자유를 위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본보기를 보여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론자유를 위해 치열하게 대결했던 그 국면에 제가 기자협회장을 한 거죠. 그렇다고 제 자신을 높이려는 건 전혀 없습니다. 그 시절이 그랬었죠.”
-남산(중앙정보부)으로 연행돼 5박6일 조사를 받으셨죠?
“(75년 4월24일) 아침 8시쯤 됐는데, 누가 왔다고 나가 보니까 남산에서 왔더군요.”
-기자협회가 국제신문인협회(IPI)에 발송한 언론 탄압에 관한 특별보고서와 국제기자연맹(IFJ)에 보낼 예정이던 보고서가 문제였다고요?
“국제기구에 언론계 상황을 알리는 기자협회 보고서가 광화문 우체국에서 기관원한테 발각됐어요. 그것을 빌미로 중앙정보부는 기협 회장단을 남산으로 연행했죠. 조사는 첫날 하룻밤만 받고 끝났어요. 그 후론 결정이 나기를 기다렸죠. 연행은 했는데 잡아넣을 거리가 마땅하지 않았나 싶어요.”
-고문 같은 건 없었습니까?
“구타나 이런 건 없었어요. 그쪽에서 어떻게 할 건가 결정이 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만 남산 양옥집이었는데, 마당이 넓어서 차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어요. 잠은 사무실 책상에서 자고 바둑도 두고 커피도 마셨죠. 그런데 며칠이 흘러도 풀릴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사퇴 의사를 표명했어요. 이 상태를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중정 사람들도 우리가 그만두면 해소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풀려났어요.” 당시 중앙정보부는 회장단에게 “국가모독죄를 적용, 구속하겠다”고 협박하며 전원 사퇴를 종용했다(한국기자협회 30년사).
-사퇴 성명서를 보면 “우리는 IPI와 IFJ에 보낸 현 언론사태에 관한 보고서의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기협의 활동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으므로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을 넣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성명서에 그런 표현을 넣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가 뭔가 잘못해서 물러난다고 할 수밖에 없었죠.”
김병익을 비롯해 연행됐던 백기범, 홍사덕, 구월환, 정추회 등 기자협회 회장단은 4월28일 사퇴를 조건으로 풀려났고 다음날 전원 사퇴했다. 기자협회보 폐간에 이어 언론자유 실천 의지가 강하던 회장단이 사퇴함에 따라 기자협회는 74년 가을 새 모습으로 출발한 지 반년 만에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그는 “언론에 대한 억압이 가혹했던 유신시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제가 사퇴하면서 기자협회 10년 역사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제가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 같아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자책했다.
-동아일보에서도 해직되셨죠?
“기자협회장을 사직했고 무기정직 상태여서 동아일보에 나갈 수도 없었어요. 사회인이 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 방학을 맞는 기분으로 지냈어요. 몇 달의 실업 생활을 하며 번역하고 ‘문학과지성’ 편집일도 하면서 지냈죠. 그러다 10월에 동아일보에서 해직통보서를 받았어요.”
7평짜리 공동 사무실에서 ‘문학과지성사’ 시작
-언론사를 떠난 것이 1975년 12월 ‘문학과지성사’ 창사로 이어진 거군요.
“그해 여름 고등학교 야구대회 구경을 갔어요. 야구 구경을 하고 나와 저녁을 먹는 참인데, 김현이 진지하게 출판사를 내자고 제안하더군요. 일조각에서 출판하던 계간지 ‘문학과지성’을 우리 이름으로 발행해야 한다는 게 첫째 이유였고 또 하나는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나와 같은 해직자가 또 나올 수 있는 상황이므로 출판사라도 만들면 기댈 언덕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권유와 격려, 강요 속에서 제가 꼼짝없이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청진동 해장국 건물 2층 한약방 한쪽 7평 공간을 열화당 출판사 이기웅씨와 공동으로 사용했어요. 나하고 이기웅씨, 직원 책상 세 개 놓고 시작했죠.”
‘문학과지성사’는 1976년 1월 중·하순 첫 책으로 홍성원 단편집 ‘주말여행’과 조해일 장편소설 ‘겨울여자’를 간행했다. 최인훈 ‘광장/구운몽’에 이어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조세희 연작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잇따라 나왔고,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첫 권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간행이 이어졌다. 김병익은 25년 동안 대표로 재직하며 1165종의 책을 간행했다. 1994년 문학과지성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했고 2000년 3월 “새로운 세기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문학과지성’의 정신과 전통을 살려나가야 한다”며 물러났다.
-2000년 3월 대표이사를 후배에게 맡기고 상임고문으로 물러났습니다.
“문학과지성사가 제법 유서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면서 할 일은 다 했다고 판단했죠. 자식들한테 물려줄 생각도 없었어요. 자식들도 자기들 공부하고 대학에 나가고 그러니까 문지를 맡을 생각도 하지 않았죠. 그래서 쉽게 훌훌 털고 나올 수 있었어요. 나중엔 내가 보유한 지분도 걸림돌이 될 것 같아 모두 후배들에게 넘겨줬어요. 집사람이 창업주가 주식을 물려주지 않고 포기한 사람은 유한양행 사주하고 나하고 둘뿐이라고 하더군요.”
김병익은 ‘글 뒤에 숨은 글’(2004)에서 동인들의 합자로 창사한 문학과지성사를 주식회사 체제로 바꾸는 과정을 밝히며 이렇게 썼다. “내가 동인들에게 평소부터 말해오며 동의를 받아온 것은 이 문학과지성사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개인에서 개인이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승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출판사의 출발이 동인들의 합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를 통해 돈을 벌기보다는 ‘문학과지성’이라는 아름다운 ‘문학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꿈으로 삼았고, 그래서 상속이나 이전이 아니라 승계라는 형식으로 그것의 수명을 영구화해야 할 것이다.”
책들 속에서, 글과 함께 살다
-수많은 책을 펴냈는데, 첫 책이 조지 오웰의 ‘1984’를 번역한 책이더군요.
“68년쯤이었는데, 미국 비평가 어빙 하우의 글을 보면서 거기에 언급된 오웰의 ‘1984’를 번역하고 싶었어요. 당시만 해도 박정희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오웰의 악몽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위험이 지식인 사회에 숨어 있었거든요. 사실 좀 두렵기는 했습니다.”
-선생님은 책들 속에서 평생 글과 함께 살아오셨어요.
“기자 생활, 편집자 생활, 발행인 시절, 이게 전부 글과 얽혀 있죠. 제 생애도 10년도 못 가고 몇 년 후가 되겠지만 나름으로 평온하면서도 치열하게 긴장되게 살았다고 그럴까요. 사회적으로 늘 저 자신이 기자라고 생각해요. 문학 비평이든 에세이를 쓰든 기자의 연장선으로 생각이 됩니다. 사회생활도 기자생활처럼 현장의 바깥에서 관찰하고 평가하기를 버릇해왔어요”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쓰고 계시죠?
“‘2013년에 만나는 빅 브라더’로 운을 뗀 글쓰기가 10년이 넘었어요. 지난봄에 그만두겠다고 했더니만 좀 더 써달라고 해요. 나도 정신적으로 지탱하려면 글을 써야 해서 내년 초까지 쓸까 싶어요.”
-지난 10년의 거대한 문명사적 움직임을 챗지피티와 같은 ‘인공지능’으로 보고 계시더군요. “언어-문자에 이어 세 번째 인류사적 비약이 이뤄지고 있다”고 하셨어요.
“지난 일요일에 쓰려다가 미뤄둔 게 다빈치하고 미켈란젤로 얘기예요. 왜 그렇게 생각이 돌아갔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인공지능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나왔죠. 내가 보기에 인류사회가 새로운 단계로 비약하는 것 아닌가. 호모가 말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사피엔스가 됐거든요. 그 말이 처음에는 타인과의 소통, 기억을 보존하려는 기억술로써 말이었다가 나중에 말 자체가 탐구 대상이 됐어요. 5000년 전 문자를 만들어 기록하고 전달하면서 두 번째 비약이 된 것인데, 기계가 말을 한다는 거는 또 한 단계의 세계로 진입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 시기를 참 중요하게 보고 있어요. 1450년대 구텐베르크 인쇄기 발명으로 인간의 지적 지평이 확 넓어지면서 책의 시대가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가 됐어요. 이제 그것이 한 단계 더 올라가고 있거든요. 저는 기계가 말하는 세계가 반드시 행복하다던가 좋아질 거라고는 낙관을 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기왕의 그 인지적 기술 발전으로 앞으로 세계가 엄청나게 변할 거란 예상은 들고, 전혀 또 다른 세계가 되겠죠. 그 세계가 어떤 형태로 올지, 인간 의식의 지평에 어떤 확대가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지만 획기적 변화를 맞는 것은 분명하죠. 제가 겪지 않는 게 아쉽지만 겪지 않아 다행이다 싶어요.(웃음)”
김병익은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 두 권의 책으로 엮었다. ‘시선의 저편’(2016)과 ‘생각의 저편’(2021)이다. 책 끝엔 각각 70여권, 60여권의 책 목록이 있다. 글쓰기의 바탕이 된 사유의 자양분들이다.
-책 제목에 들어간 ‘저편’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문학과지성사가 마포구 신수동 출판단지에 있었어요. 거기 마당이 꽤 넓었습니다. 문득 담장을 보는데, 우리 의식이라는 게 여기에 갇혀 있지만, 저편을 내다봐야지 않을까. 상대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저편’이란 단어를 떠올렸죠. 2021년 3월 이후에 실린 글을 모아 책을 내면 ‘존재의 저편’으로 할까 싶어요. 죽음으로 이쪽과 저쪽 세계를 보고, 내가 아니라 나를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본다는 것, 사후 세계까지 저편이라는 게 참 넓은 영역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준비하는 책이 또 있나요?
“가을이나 겨울에 500페이지짜리 책이 나올 것 같아요. 문단에 데뷔한 후 주제에 맞지 않아서 혹은 좀 미흡해서 밀쳐둔 글들하고 2017년 마지막 책 이후에 나온 산문, 고등학교 때 쓴 시와 잡문, 대학시절에 쓴 글들을 모았습니다. 그거 말고 한겨레 칼럼을 모아 내려고 해요. 그러면 제 글쓰기 작업도 끝날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사유죠. 그래서 글쓰기를 그만두면 사유를 끝낸다는 얘기가 되니까 섭섭해지대요. 내 생애 의미를 스스로 단념하는가 싶고. 그렇지만 묵은 세대의 글이 얼마나 쫀쫀하고 재미없는지 알게 되니까(웃음). 더 이상 추한 꼴을 안 보이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내년쯤에는 글쓰기 작업도 끝낼까 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가 매일 바라본다는 광장으로 나왔다. 사진을 몇 장 찍고 헤어질 때 50년 전, 30대 기자 김병익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기자로 남아 있겠다. 기자는 유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회피해서도, 물러나서도 안 되며 현장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기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가 던졌던 ‘왜 기자로 남아 있는가’라는 물음은 당대의 우리에게도 유효하지 않을까.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