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수익모델, 혁신 역량 약화… 재력가들 손쉽게 '언론사 쇼핑'

[노혜령의 Media Big Read]
(11) 프랑스 언론계 편집국 독립권 집착과 대기업 지배의 역설

자비에르 니엘. 프랑스를 대표하는 일간지 르몽드를 파산의 벼랑 끝에서 구한 인물이다. 그의 자산은 올해 기준 108억달러(약 15조원). 프랑스 9위의 자수성가 통신 재벌이다. 그는 2010년 프랑스 부호 2명과 르몽드 그룹을 공동 인수했다. 투자은행 라자르드의 프랑스 대표 마티외 피가스, 입생로랑 공동 창업자이자 예술계 거물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다. 셋은 지분 60%의 대가로 1억1000만유로(약 1635억원)를 르몽드에 투입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베르제 사망, 피가스 지분 매각 등으로 니엘은 르몽드 1대 주주가 됐다. 공개되진 않았지만, 약 50~60%의 지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도·좌우언론 장악한 프랑스 억만장자

1973년 장 폴 사르트르가 68혁명의 정신으로 창간해 일종의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던 리베라시옹도 재정난에 허덕이다 억만장자에게 넘어갔다. 논란의 이스라엘 출신 통신 재벌 패트릭 드라히가 2014년 소유권을 획득했다. 앞서 2004년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 르피가로가 프랑스 방산 재벌 세르주 다쏘(2018년 사망 후 상속인들이 승계)에게 매각됐다. 중도(르몽드), 우파(르피가로), 좌파(리베라시옹)의 3대 종합 일간지가 대기업 오너 품에 안긴 것이다. 프랑스 최대 일간 경제지 레제꼬(2007년), 파리 지역 일간지 르파리지엥(2015년), 인쇄부수 기준 최대 주간지 파리-매치(2024년)도 명품업체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 손에 들어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르몽드 매각 후 14년의 여정은 ‘언론사의 지배구조’라는 난제를 곱씹게 한다.

지배구조 장점을 단점으로 바꾼 디지털 전환

르몽드 주주는 1944년 창간 이후 줄곧 기자 등 사원들과 소액 투자자들이었다. 편집권 독립의 안전장치였다. 2차 대전 후 신문이 과점의 광고 플랫폼으로 번창하면서 돈벌이 걱정은 없던 시절이다. 노조원이 주인인 이 구조는 디지털 국면에 들어서자 약점으로 변했다. 신문 부수 급감 속에서도 인쇄 자회사의 윤전기 3대와 300여명의 직원을 끌고 가느라 매년 400만유로(약 60억원) 이상씩 적자가 쌓여갔다. 인수 당시 1억유로(약 1500억원) 빚더미에 앉아 1주일 후면 현금이 바닥날 절박한 상태였다. 기업가 출신 새 소유주들은 즉시 기업 출신 측근들을 경영진으로 앉혔다. 곧바로 나온 인쇄부문 85% 감원안은 격렬한 반발에 부딪쳤다. 2011년 6월에만 4번이나 신문발행이 중단됐고, 10월에도 이틀 연속 윤전기 가동이 멈췄다. ‘파업으로 오늘 휴간합니다’라는 사고(社告)가 반복되는 초유의 사태 끝에 66% 감원으로 1차 합의했다. 결국 남은 인쇄 부문 직원 87명 중 절반은 재배치하고, 나머지는 명예퇴직함으로써 2015년 인쇄 부문을 폐쇄한다는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르몽드의 내부 인쇄 비즈니스는 26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4년 5월에는 디지털 전환의 방향성을 둘러싼 이견으로 고위 편집 간부 7명이 집단 사퇴한 데 이어 편집국장도 물러나는 등 편집국 갈등도 골이 깊었다. 하지만 2015년께 드디어 5년간의 진 빠지는 구조조정이 한 단계 마무리됐다.

니엘의 르몽드 턴어라운드 전략

동시에 콘텐츠 다양화에 나섰다. 2013년 베테랑 경제 기자들을 영입, 비즈니스 섹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치와 국제뉴스에 치중된 한계를 벗어나 고급 독자층을 유인하는데 주효했다. 디지털 전환도 병행했다. 2015년에 아프리카 전역을 커버하는 디지털 플랫폼 ‘르몽드 아프리카’를 내놨다. 전 세계 3억명에 달하는 프랑스어 권역의 1등 언론이 목표다. 같은 해, 아침 7시에 발간되는 조간 앱 ‘라 마티날(La Matinale)’을 내놓아 석간의 약점을 보완했다. 2022년에는 미국에 지사를 차려, 영어판 발행도 시작했다. 세계 수도인 미국 뉴스를 프랑스어권에, 프랑스어권의 뉴스를 세계에 알리는 관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영어판에는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 효율성을 높였다. 이런 확장에 발맞춰 편집국 인력은 310명에서 540명으로 늘었다.


인수 당시 르몽드 인쇄판 유료 구독자는 약 30여만명, 디지털 구독자는 3만여명에 불과했다. 올 6월 현재 인쇄판 구독자는 7만여명으로 줄었지만 디지털 구독자는 54만명으로 늘었다. 디지털 구독자 비중이 90%에 육박한다. 총 유료 구독자는 61만여명. 전성기(약 45만명)보다 많다. 인수되던 2010년에 3400만유로(약 506억원)에 달하던 적자는 2016년 흑자로 전환됐다. 2023년 순익은 230만유로(약 34억원). 크진 않지만 흑자 기조가 지속되고 있다. 2023년 매출은 3억450만유로(약 4531억원)로 2010년(3억7300만 유로)과 엇비슷하다. 양적 성장은 아직 미흡하지만 디지털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서 1차 성공이다.

부호들 언론사 인수… 영미 vs 프랑스 차이점

어두운 면도 있다. 언론사가 억만장자들의 “부자 클럽”으로 전락했다는 자괴감이 깃들었다. 르몽드 소유주의 편집권 개입 사례는 없었지만, 정치적 담론과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흑심에서 언론사에 투자한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니엘 등이 없었다면 부채 상환과 디지털 투자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막대한 선투자 없이, 부서진 비즈니스 모델을 재건할 길은 요원했을 것이다. 언론계 밖에 있던 재력가들의 언론사 쇼핑이 세계적인 추세가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올 9월과 10월에만도 영국의 3개 신문이 헤지펀드 등에 인수되거나 절차를 밟고 있다. 세계 최초(1791년) 일요신문 옵저버, 세계 최초(1828년) 주간지 스펙테이터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라프(1855년)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2013년 워싱턴 포스트(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와 보스턴 글로브(미국 보스턴 레드삭스 및 영국 리버풀 구단주 존 헨리), 2018년 LA 타임스(난트케이웨스트 회장 패트릭 순숑)와 포춘(태국 사업가 차차발 지아라바논), 타임(세일즈포스 창업자 마크 베니오프 부부) 등 다 헤아리기가 버겁다. 영미권 특징은 일부 부호들이 개인 돈으로, 또는 사모펀드 등 금융권에서 투자 포트폴리오 일환으로 언론사를 사들인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 블룸버그 등 톱 언론사들은 자체 역량으로 디지털 전환을 이뤄가며 입지를 굳히는 점도 프랑스와 차이다.

프랑스 대기업, 언론사 싹쓸이 쇼핑

비 미디어 대기업 오너들의 언론사 싹쓸이 쇼핑은 유독 프랑스에서 심하다. 디지털 유료 구독자수 기준으로 프랑스 1~12위 언론 중에서 비영리단체 3개 매체와 스포츠지 1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대기업 계열사나 오너 소유다<그래픽>. 프랑스 10대 부호(2024년 기준) 중 5명이 언론사를 갖고 있다. 이유가 뭘까. 세계 최고 수준의 언론사 보조금과 반자본주의 정서, 사원 주주 지배구조 등 편집권 독립에 집중된 관행이 역설적으로 언론사들의 혁신 경영 역량을 약화시켰다는 해석이 많다. 기존 수익모델이 무너지자 속수무책이 됐고 자금력이 탄탄한 대기업 오너 외에 대안이 없어진 것이다. 억만장자나 사모펀드의 인수에 대한 국지적 반발 속에서도 경제 논리로 흘러가는 영미 문화와 달리 프랑스 언론에서는 여전히 반자본 정서가 강하다. 결국 편집국 독립 보장의 압박 속에서 올 4월, 니엘은 자신의 지분을 비영리 펀드인 ‘언론 독립 기금(Fonds pour l'independance de la presse)’으로 넘겼다. 니엘의 개인 회사 NJJ 프레스가 갖고 있던 르몽드 그룹 주식의 99.9%를 1유로에 매각하는 방식이었다. 이제 기금 동의 없이 르몽드의 재무적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됐다. 이와 별도로 언론독립위원회(Pole d'independance)도 르몽드 지분 25%를 갖고 있다. 2010년 니엘 등이 인수할 때 편집국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만든 기구다. 기자 등 직원들과 독자들이 멤버다. 한숨 돌리자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이 조처가 장기적 균형 발전에 보약이 될지, 상시 혁신의 시대에 성장 둔화로 회귀하는 자충수가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디지털 전환 발목잡는 한국식 모델의 한계

영미 언론의 역사를 보면 혁신 기술이 등장하고 시대 정신이 바뀔 때마다 더 큰 자본력을 가진 기업가들이 언론사 새 주인으로 등장했다. 언론사가 한층 대형화되고 저널리즘 방식도 변화했다. 뉴스 상품의 속성상 자본과 언론의 자유 사이에 아슬한 줄타기는 역사적 숙명이다. 이 문제를 한칼에 해결할 단일 제도란 없다. 고품질 뉴스 생산과 돈 버는 DNA 간 균형을 유지하는 언론사만이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에서도 자본의 언론 지배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프랑스 언론처럼 경영혁신 역량도 대기업들에 뒤진다. 그렇다고 프랑스식 대기업의 언론사 인수는 생각하기 어렵다. 대신 광고 등의 형태로 대기업이 언론계 전반에 일종의 간접 보조금을 주는 독특한 관행이 정착됐다. 디지털 보릿고개에서도 파산 끝까지 몰린 언론사가 드문 데는 이런 관행이 한몫했을 것이다. 동시에 대규모 선투자가 필요한 디지털 전환의 성공 사례가 아직 없는 이유기도 하다. 프랑스식, 영미식, 한국식 모델은 다 장단점이 있다. 비교형량으로 어느 모델이 나은지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이 점이 국내 언론계 디지털 전환을 어렵게 하는 근본 원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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