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14일자 기자협회보에 <숨은 권력과 편집국 민주주의-한 칼에 꺾인 ‘편집국의 꽃’>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다. 글쓴이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부 손석춘 기자였다. 순석춘은 동아일보 사주를 ‘숨은 권력’으로 비판하며 사주의 편집권 유린이 동아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언론이 직면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력은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철권을 휘두를 때 차라리 정직하다. 은폐된 곳에서 그의 논리를 냉혹하게 관철하는 ‘숨은 권력’은 그 가면을 벗기지 못할 때까지 ‘민주주의의 수호신’으로 자처하기 마련이다….” 평기자가 사주를 비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손석춘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문사의 사주를 저격한 것일까.
편집국장 경질 암시한 사내 회람 문건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은 그해 8월1일 김중배 편집국장을 돌연 조사연구실장으로 발령냈다. 김중배 국장이 편집국장 자리에 앉은 지 1년이 겨우 지났고, 동아일보 지면이 다른 신문과 차별화되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동아일보 안팎에서는 최고 경영진이 김 국장이 취해온 진보적 편집 방향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경질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김중배 국장 돌연 경질 당시 편집국 기자들에게 이상한 문건이 돌았다. 제목이나 일시, 발신자가 명시되지 않았으나 문건 내용에 ‘내’라는 1인칭으로 서술돼 작성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김병관은 이 문건에서 “우리의 사시인 민족·민주·문화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극소수의 극렬분자들을 단지 ‘소수’요 ‘약자’이기 때문에 비호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체제 부정이나 국민의 위화감 조성에 지면을 할애함은 용납할 수가 없어 편집진의 변화를 통해 신문의 편집 방향을 재정비”하겠다고 했다. 소설가 윤정모의 책과 폴 바란의 책을 서평란에 싣고, 성심여대 한국사 교수 안병욱이나 빈민운동가 제정구의 칼럼을 지면에 실었다는 것이 ‘체제 부정’이나 ‘국민의 위화감 조성’ 사례라고 주장했다.
김중배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극렬분자들에 대한 기사를 싣고, 진보적 성향 인사들의 칼럼 게재를 용인하고 조장했다는 것이다. 사장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한마디로 사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자르겠다는 경고였다. 편집권에 대한 사주의 자의적 판단과 전횡 의지가 문건으로 드러나고 편집국장 경질로 나타났지만 기자들은 조용했다.
목욕재계하고 나온 김중배 작심 발언
이 침묵을 깨뜨린 것은 김중배였다. 1991년 9월6일 저녁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4층 편집국에서 편집국장 이·취임식이 열렸다. 그는 “이 자리에 목욕재계하고 나왔다”며 이임사의 운을 떼고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1990년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권력보다는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도전의 세력에 맞서게 되었다는 게 신문기자 김중배의 진단입니다.…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권력은 자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 사태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언론에 대한 자본의 압력은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것입니다. 독재권력은 우리가 경험했듯이 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본의 압력은 당장에 거세되지 않을 것입니다.”
김중배는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전제하고 “최근 동아가 취한 일련의 인사조치와 국장 경질 뒤 자유로운 편집을 제약하고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는 일명 ‘보도지침’이란 괴문서가 사내에 나돌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정작 그 누구도 자본의 이러한 횡포와 부당한 간섭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누군가 돌멩이 하나를 던져야 파문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런 충정으로 이 환송회의 자리가 김중배가 동아일보를 물러서는 자리로 인식하고 물러가고자 한다”고 했다. 편집국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사주와 자본의 언론 통제를 경고하며 동아일보를 떠난다는 이임사는 언론계 안팎에서 ‘김중배 선언’으로 회자됐다. 당시 한국 최고의 신문이었던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사주의 편집방침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항의사표를 던진 것은 사건 그 자체였다. 사주를 ‘숨은 권력’으로 비판했던 손석춘도 사표를 냈다.
쉰여섯 살의 편집국장
1년 전 김중배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임명된 것은 이변이었다. 사장 김병관과 동갑인 그의 나이(56세)로 보나 후배들이 편집국장을 거쳐 갔다는 점에서 그의 편집국장 임명은 의외의 인사였다. 1957년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김중배는 1963년 동아일보로 옮긴 뒤 사회부장을 거쳐 1973년부터 16년간 논설위원을 지냈고, 1989년 출판국장으로 있었다. 그런 김중배를 김병관은 전격적으로 편집국장에 임명했다. 1990년 6월15일이었다.
김병관이 김중배를 임명한 것은 제2창간 선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김병관은 1989년 3월25일 사장에 취임하며 “거룩한 동아일보의 창간 전통에 다시 한 번 중흥의 불을 댕기는 제2의 창간을 기하겠다는 결의를 밝히며” 제2창간을 천명했다. 제2창간을 내건 배경에는 부동의 1위였던 발행부수와 영향력을 조선일보에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었다. 명칼럼으로 동아일보의 가치를 올린 ‘김중배 편집국장’ 카드로 재도약의 발판을 놓으려 했다.
김중배가 동아일보 주말판 ‘동아마당’을 섹션으로 만들며 사내 안팎에서 호응을 얻고 있을 때 대구 페놀 사건이 일어났다. 1991년 3월14일에 경북 구미의 두산전자에서 페놀원액을 담아둔 탱크에서 30톤이 흘러내려 대구 상수원을 오염시키고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 사건이다. 페놀은 낙동강을 타고 계속 흘러 대구는 물론 부산과 마산을 포함한 영남 모든 지역이 페놀 수돗물 파동에 휩쓸렸다. 사건을 덮는 데 급급한 두산그룹에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김중배는 연일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 해설기사로 다루며 사안의 심각성을 집중적으로 계속 보도했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낙동강을 비롯해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우리나라 하천의 오염실태를 시민단체와 함께 심층진단하는 장기시리즈를 기획, 보도했다. 이 시리즈는 여러 이유로 중도에 흐지부지됐다.
“김중배 사회주의를 경계해라”
김중배와 동아일보 경영진이 틀어진 계기는 1991년 4월 강경대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시국에 대한 보도 태도인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그 사건 이전과 이후에도 편집방침을 둘러싼 갈등이 적잖이 있었다. 지면 제작에 대한 사주의 노골적인 간섭 때문이었다. 갈등이 증폭된 것은 페놀 사건 보도가 결정적이었다. 김병관은 주필을 비롯해 이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김중배를 추궁했다. “아니, 신문사가 그 신문사의 대광고주를 그렇게 함부로 비난을 해도 되는 거요?” 두산그룹에서 김병관을 비롯해 이사들을 찾아다닌 뒤였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이 펴낸 <동아평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국 곳곳에서 골프장이 온 산을 만신창이로 만든다는 기사를 사회면 머리로 올렸을 때도, ‘우루과이라운드가 온다’는 연재물을 통해 농업의 미래로 유기농을 비롯해 대안을 제시해갈 때도 경계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이윽고 사장과 동창이자 동아일보 이사인 변호사가 김 국장을 만나자고 하더니 ‘동아일보가 진행하고 있는 보도 방향과 관련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시장경제를 중시한다’고 강조했다.”
편집국 안팎에 ‘김중배 사회주의를 경계해라’는 말이 나돌았다. 김병관은 1991년 5월27일 부장·위원회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동아의 얼이요 넋”이라며 “이러한 가치 기준을 일탈한 기사나 글이 지면에 엄청나게 크게 실리는 일이 없어야 하며 이런 사실이 앞으로 발견되면 편집인이나 발행인의 힐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는 두 달이 조금 지난 8월1일 편집국장 경질로 이어졌다.
김중배는 그해 연말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사표 제출은 반언론적 질서에 대한 항의였다”면서 “그러나 나보다는 후배기자들이 노조 공보위에서 거론하기를 바랐다. 개인적 인사불만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한 달을 참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사내 ‘보도지침’이 하달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이에 대한 일체의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동아일보 내부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노조 간부, 공보위원, 편집국 대의원 등 기자 20여명은 김중배가 사표를 낸 며칠 뒤 긴급회의를 갖고 ‘김 전 국장의 경질과 인사조치는 사측의 독단적이고 무분별한 인사권 행사’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발행인과의 대화를 요구했다. 9월19일 동아일보 노조는 사주와 만난 자리에서 ‘보도지침’에 집단 항의했다.
기자들은 “문제의 발단이 된 ‘보도지침’에 대해 사장의 분명한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잘못됐으니 취소하겠다든지, 정정하겠다든지, 아니면 유감이라든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병관은 “절대 취소도 정정도 않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보도지침이 아니고 신임국장에게 준 메모에 불과하다.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국장의 자유다”라고 답했다.
그해 말 김중배는 한국기자협회가 뽑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됐다. 투표에 참여한 전국 기자 2761명 가운데 53.9%(1489명)가 김중배에게 표를 던졌다. 기자협회보는 김중배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언론통제와 언론자율성 위기가 언론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언론인의 자율규제가 이를 배태시키고 증폭시키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위기 상황을 온몸으로 고발했다.”
※이 기사는 김중배 기자 50년 기념집 발간위원회가 2009년 1월에 펴낸 ‘대기자 김중배-신문기자 50년’(나남)과 손석춘이 2021년 3월에 펴낸 ‘동아평전’(자유언론실천재단)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