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이 안되는 진짜 이유

[스페셜리스트 | 금융] 이진명 매일경제 기자·산업부


   
 
  ▲ 이진명 매일경제 기자  
 
1998년 김대중 정부는 규제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규제 개혁에 칼을 뽑아들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규제 총량제를 앞세워 규제와의 전쟁을 벌였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을 가로막는 ‘전봇대’를 뽑겠다며 규제 개혁을 시작했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취임과 함께 ‘손톱 밑 가시 뽑기’에 나섰다.

역대 정권이 규제 줄이기에 나선 걸로 치면 벌써 17년째다. 그런데 규제는 전혀 줄지 않고 있다. 잠시 규제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정부 스스로 집계한 규제 수만 줄었을 뿐 기업들이 느끼기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를 빗대 ‘우리의 원수’ ‘암 덩어리’ 등 격한 표현까지 동원했을까.

정부 기관을 출입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관료들의 수법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장관이 청와대에 와서 ‘지난해 말 현재 저희 부처 소관 ○○○개 규제 중 연말까지 ○○개를 줄여 ○○○개로 만들겠습니다’라는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꼼수’가 숨어있다.

먼저 조항 합치기다. 예를 들어 ‘카드사는 ○○할 수 없다’라는 규제와 ‘할부금융사는 ○○할 수 없다’라는 규제를 합쳐 ‘카드사와 할부금융사는 ○○할 수 없다’는 조항으로 만드는 것이다. 규제 수는 두 개가 하나로 줄었지만 실제 규제는 똑같다.

두 번째는 인허가 사항을 신고제나 등록제로 바꾸는 식이다. 언뜻 보기에는 규제가 크게 완화된 것 같지만 정작 담당 공무원이 신고나 등록 접수를 일방적으로 거부해 규제 완화의 효과를 일거에 무력하게 한다.

세 번째는 규정을 없애는 대신 시행령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하위 규제를 몇 개 없애면서 상위 규제에 ‘국민 정서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조항을 넣어 실질적으로는 규제를 더 강화하는 수법이다. 이러니 기업들은 정부를 믿을 리 없고, 대통령은 오죽 속이 터졌겠는가.

어찌됐건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관료와 규제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시작된 것은 일견 긍정적이다. 하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관료는 규제하기 위해 존재하며 규제가 관료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에 관료는 절대 규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100%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 질서를 지킨다는 긍지 하나로 살아가는 관료들이 왜 규제에 목을 매는지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참여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서민금융 활성화를 위해 저축은행 규제 완화는 당시의 최우선 과제였다. 영업점 확장 규제, 대출 제한 규제 등 웬만한 규제를 다 풀도록 정권 차원에서 독려했다. 누군가 나서서 일부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설명이라도 할라치면 규제개혁위원회가 시대에 역행한다고 비판을 퍼부었다.

하지만 MB정부 들어 부산저축은행 부실 사태가 터지자 저축은행 규제 완화에 관여했던 관료들이 줄줄이 감사원 조사를 받았다. 일부 문책도 받았다. 그 상황에서 ‘지난 정권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는 MB정부 최고의 과제였고 이를 위해 관련 규제 완화에 동참했던 관료들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돌변한 감사원 앞에 꼼짝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옛날 카드사태는 어땠고 최근의 동양사태나 지금의 정보유출 사태는 또 어떤가. 경제 살리기, 투자 활성화, 정보 가속화 등의 이유로 규제 완화에 나섰다가 뭔가 사고가 터지고 나면 담당 관료를 징계하는 게 감사원의 생리 아니었던가.

관료는 직업 공무원이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에 장단 맞추다가는 감사원 생트집에 20년, 30년 자신의 경력에 금이 간다. 규제 풀어서 경력에 금가느니보다는 규제해서 잠깐 욕먹고 마는 게 낫다. 그러니 대통령이 질책한다고 사라질 규제가 아니다. 관료들이 잠깐 규제 푸는 시늉은 하겠지만 돌아서면 다시 옭아맬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통령이 진짜 규제를 없애고 싶다면 규제에 목매는 관료들을 다그칠 것이 아니라 정권만 바뀌면, 사고만 터지면, 호시탐탐 관료들 옥죌 기회를 노리는 감사원의 관행부터 손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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