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자질

[스페셜리스트 | 경제]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사회부 법조팀


   
 
  ▲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지난해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취재원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피고인이 항소해 사건이 서울고등법원으로 넘어왔는데 재판장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는 하소연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라고 하니, 재판장이 너무 피고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게 수상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피고인쪽 변호인이 재판장에게 손을 쓴 게 아니겠냐고 했다.

도대체 어떤 재판부에서 사건을 맡았길래 취재원이 이런 하소연을 하나 싶어 사건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사건번호를 넘겨받아 담당 재판부를 확인한 필자는 취재원에게 “절대 변호인과 청탁할 재판장도 아니고, 돈을 줘도 받을 분도 아니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마라”고 안심시켰다. 한편으로는 웃음도 났다. 그 부장판사라면 피해자들로부터 이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취재원과 함께 재판 전 과정을 지켜봤다. 실제로 재판장은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을 거의 끊는 법 없이 경청하고 있었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턱을 받치고 집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피해자의 가족 입장에서는 재판장의 저런 모습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려는 태도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편 들었다.

결론적으로 해당 피고인은 1심과 동일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선고 당일에서야 피고인을 꾸짖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다.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형을 사는 동안 피해자에게 사죄하길 바란다”고 했다. 피고인은 선고가 끝나자 조용히 구속피고인 대기실로 들어갔다. 비록 형은 단 1년도 감형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피고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방어권을 행사했을 것이라 생각됐다. 취재원은 재판이 끝난 뒤 그 재판장을 두고 “법원은 처음 와봤는데 판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참 멋있는 분인 것 같다”고 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가장 정치적 사건으로 분류되는 한 사건의 재판장을 개인적인 일로 찾아뵌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부장님이 너무 양쪽 말을 다 들어주고 있으니까 기사 마감이 늦어지지 않냐”고 농담을 던졌다. 실제로 재판장은 법정에서 동어반복에 가까운 검찰과 변호인 양측의 이야기를 거의 끊는 법 없이 들어주고 있었다. 재판은 매번 오후 9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양측이 불필요한 말다툼을 해도 나중에 중재를 하거나 꾸짖는 한이 있어도 일단을 들어주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은 “아직 재판이 진행중이니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양측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라는 원망은 하지 않아야 않겠나”라고 했다. ‘그래도 너무 동어반복이지 않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게 치면 1심 사건기록과 공판기록만 보고 판결하면 될 일일텐데 그건 아니다. 1심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새로운 쟁점이 나올 수도 있으니 재판장은 끝까지 들어준 뒤 판단하면 될 일이다”라고 했다.

최근 평소 존경해온 한 부장판사가 진행하는 재판에 방청을 들어갔다. 해박한 법지식을 갖고 있고, 실제 훌륭한 판결도 많이 내린데다 여러 사법정책 개선에 앞장서는 등 훌륭한 법관이라고 생각해온 분이었다. 그러나 방청석에서 올려다본 그 부장판사는 권위적인 법관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자신의 진행방식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법통역인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은 설령 통역인이 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굳이 저렇게 했어야만 했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어쩌면 이날 처음으로 법정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사법부는 그 부장판사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법정을 나온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은 “무섭다”고 했다.

국민이 생각하는 훌륭한 법관이란 무엇일까. 훌륭한 판사의 자질이란 어떤 것일까. 어쩌면 그 답은 판결문이 아닌 법정 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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