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내가 제일 부러웠던 건 ‘어떤 것’을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 꾸중’도 듣지 않던 친구였다. 당연히 해 왔어야 할 숙제를 내지 않았는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친구의 변명에 선생님은 그냥 넘어갔다. 마땅히 했어야 할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시험 성적이 바닥이었는데도 선생님은 친구에게 ‘공부를 하라’고 꾸짖지 않았다. 내 기준으로 친구는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았는데 불이익이 전혀 없었다.
십여년 시간이 흐른 요즘도 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한숨을 쉴 때가 많다. 물론 그 때처럼 부러운 건 아니다. 좀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다.
검찰 조직은 힘이 세다.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조직 내 사람이다. 겸손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애써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소독점주의 등 법으로 정해진 어려운 얘기할 것 없이 검찰이 누군가를 조사하겠다고 나설 때 조사 당사자가 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검찰 문턱을 넘는 순간 검찰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모두 권력이 된다. 검찰 개혁을 주장하는 이유가 결국은 “검찰의 힘을 빼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요즘 검찰의 진짜 힘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힘’에서 나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나의 사건이 있다고 치자. 검찰이 택할 선택지는 무수히 많다. 언제부터 누구를 어떻게 조사할지, 어떤 법을 적용할지, 종국적으로 죄를 물어 재판에 넘길지 아니면 무혐의로 끝낼지 등 여러 가지 중 택하는 건 검찰 마음이다. 거꾸로 하면 기대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힘 있는 누군가를 불러 조사하지 않고 서면으로 조사해 수사를 결론짓거나, 아예 조사조차 하지 않고 넘어가도 ‘비판’할 게 사실 없다. ‘법을 기준으로 법 해석에 따라 처리했다’고 하는데 뭐라 하겠는가.
최근에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딸의 수원대 교수 특혜채용 의혹과 관련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는데, 이인수 수원대 총장의 사학비리 사건 수사를 수원지검에서 하면서 5개월이 다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다. 출국금지, 압수수색도 없었지만, ‘수사 기법에 따른 결정’이었다. 어떤 사건은 ‘고소가 들어온 이상 안 할 수 없다’고 검찰은 얘기하지만 또 다른 사건은 ‘왜 고소를 했는데 조사조차 안 하냐’는 고소인의 항의가 빗발치는 곳이 검찰이다.
법원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대법원에 있는 2년 넘은 행정소송은 190건이나 됐으며 민사소송은 325건이라고 한다. 모두 한 해 전과 비교할 때 대폭 증가한 숫자다. 이 가운데 이주노동자 권리를 찾기 위한 외국인 노동자 노조 사건은 8년째 결론이 나지 않았다. 5년 이상 7~8년 된 사건이 수두룩한 것이 지금 현실이다. 현역 의원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도 대법원에 간지 1년이 됐지만 여전히 검찰과 변호인 측의 의견서만이 오갈 뿐이다. 한 총리 같은 200여명의 형사 피고인들이 대법원의 결론을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소송 당사자들은 애를 태울 뿐이다. 왜 미뤄지는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정보조차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곳이 대법원이기도 하다.
사법 개혁이라는 말은 이제 진부한 말이 돼 버렸다. 개혁은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핵심이었다. 개혁은 검찰과 법원 등 준사법, 사법기관에 대한 신뢰의 핵심이기도 했다. 검찰과 법원 관계자들은 ‘꽤나 많은 개혁이 있어왔다’고 한다. 예전의 검찰과 법원이 아니라는 말은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에도 답할 때가 된 것 같다. “왜 우리 검찰과 법원은 당연히 해야 할 수사와 판결을 지금 하지 않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