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꽃 하나, 이게 행복

[스페셜리스트 | 문화] 심연희 KBS 기자

새벽 3시인데 죽어라 잠이 오질 않는다. 이럴 땐 미련 없이 일어나야 한다. 모두가 잠든 도시의 새벽, 나는 차 안 가득 음악을 머금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입구부터 밀려오는 특유의 냄새. 꽃향기와 풀 냄새, 물비린내 그리고 라면, 찌개 등 상인들의 밤참이 뒤섞인 ‘삶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좀 지나갑시다!’ 머뭇거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그만 놀라 엉거주춤 들어서게 되는 곳. 커다란 상자를 나르는 발걸음이 분주하고, 부스스한 얼굴로 저마다의 꽃을 찾는 눈빛들이 엉키는 곳. 이 은밀한 세계는 바로 도시의 살아있는 밤, 활기 넘치는 ‘새벽 꽃 도매시장’이다.


생선처럼 켜켜이 쌓인 꽃들을 보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우선 심호흡을 하고 한 바퀴를 돌아본다. 이때 나는 꽃길을 걷는 음악가라도 된 듯 뒷짐을 지고 걷는다. 산책을 하면서 교향곡 6번 ‘전원’을 떠올리던 그 베토벤처럼 말이다. 누가 들으면 치료가 필요하다고 할까. 어딘가 나를 따뜻하게 불러주는, 삶에 영감을 주는 녀석들을 틀림없이 만나게 되리라는 설렘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와, 벌써 작약이 나와요?” 시장엔 벌써 5월 하순을 대표하는 함박꽃, ‘작약’이 선보였다. 꽃시장엔 이렇게 늘 계절을 반 발짝 앞서가는 ‘재미’가 있다. 꽃샘추위가 매섭던 한 달 전쯤 벚꽃과 매화나무, 설유화 가지에 흐드러지게 피운 꽃, 고귀한 자태의 튤립이 만발해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지금은 튤립이 쏙 들어가고, 대신 청초한 모습의 노란 수선화가 등장했다. 


그새 몸값을 확 낮춘 꽃도 제법 많아졌다. 졸업시즌 치솟았던 장미, 하늘하늘한 꽃잎 수백 장이 둥글게 포개진 사탕 같은 꽃 ‘라넌큘러스’가 한 단에 만원도 안 되는 착한 가격으로 손짓한다. 이렇게 싸도 되는 건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키웠을 농민들을 생각하니 차마 흥정을 할 수가 없다. 신문지에 둘둘, 담백하게 포장한 어여쁜 꽃들을 데려와 물에 닿는 부분의 잎을 쳐내고 다듬은 뒤, 물을 반쯤 채운 화기에 나눠 담는다. 식탁 위, 욕실, 그리고 침대 머리맡, 제자리를 찾아준다. 아침 햇살에 물까지 배불리 먹은 꽃은 어느새 봉오리를 톡 터뜨렸다. 손을 씻다가, 아침을 먹다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삶에 쉼표 하나가 찍히는 듯하다. ‘그래, 이게 행복이야.’ 


흔히 꽃은 한순간일 뿐 시들 때는 처절하고 심지어 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금세 시들거나 마르기 쉬운 꽃들도 매일 깨끗한 물로 바꾸고, 사선으로 줄기 끝을 잘라주며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훨씬 건강하게 오래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손이 가는 건 당연지사. 오히려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면 점점 작아지는 꽃을 보는 기쁨까지 새롭게 알게 된다. 처음엔 한 아름이던 꽃이 다듬어지고, 솎아지면서 나중엔 작은 컵에 자리하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우리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옛 선조는 꽃 한 송이에서도 우주를 보았다고 한다. 씨앗을 화분에 흙 채워 심고, 때맞춰 물주고 가꿔 솟아오르는 꽃대에서 참 삶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말없이 피어오르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천천히 자연에 수긍하며 아름답게 시드는 과정까지 살피고 돌보는 것에서 세상을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깨우쳤던 게 아닐까. 빛과 물, 공기, 그리고 이를 바라볼 마음의 여유 한 자락만 있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일상 속에 꽃을 들일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를 것 없는 것 같은 고단한 삶이지만 우리 집 식탁 위 ‘나의 꽃’은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나도 그렇게 천천히 변해간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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