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만남
2010년 3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밥 딜런의 첫 내한 공연 취재를 위해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에 있었다. 언제 다시 한국을 찾을지 모를 포크 황제가 무대를 내려가자마자 기사 송고에 매달렸다. 급하게 마감을 마치자마자 허기가 밀려왔다.
때마침 한 영화평론가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학로에서 어느 감독, 배우들과 술을 한 잔하고 있으니 합류하고 싶으면 한강을 넘어오라고 했다. 급하게 달려갔다. 얼큰한 안주와 쓴 소주 생각이 간절해서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과 배우 문성근씨가 함께한 술자리라 조바심이 났다. ‘이동하는 사이 두 사람이 자리를 뜨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을 누르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래 전부터 이 감독을 만나고 싶었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2003년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면서 그는 언론을 멀리했다. 정부의 기자실 운영방침을 두고 그는 기성 언론과 크게 불화했다. 문화부 장관을 물러난 뒤에도 앙금은 남았다. 2007년 그는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전도연에게 안기며 감독으로서의 삶을 화려하게 재개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장관 출신이라는 이력은 여전히 언론과 높고 두꺼운 벽을 쌓도록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에 그에게 연락하려 했다. 이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한 영화인에게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 오래된 번호라 아마 맞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상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 번호를 자신으로부터 알았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다. 전해 받은 휴대폰 번호는 결번이었다.
갑작스레 만남의 기회가 왔으니 노동으로 지친 봄밤에 귀가를 마다하고 대학로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감독은 1970년대 충무로를 대표했던 여배우 윤정희씨와 영화 ‘시’의 촬영을 마친 직후였다.
술자리는 어수선했다. 자리 사이사이가 비어있었다. 이 감독과 문성근씨, 선배 평론가, 스태프 2명이 앉아있었다. 이 감독은 딱히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말을 걸 기회를 엿보는데 반격을 당했다. 이 감독은 스태프 2명에게 임무를 줬다. “여기 기자 분 어려워하지 말고 말을 좀 많이 나눠라, 그것도 공부다.” 얼떨결에 인간 차단막이 형성됐다. 1시간 정도 술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이 감독에게 별다른 말조차 걸지 못했다.
영화 ‘시’와 주연배우 윤정희씨
4월 영화 ‘시’ 시사가 있었다. 이 감독은 애초 인터뷰를 않겠다고 홍보대행사를 통해 못을 박았다.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만 예외였다. 영화는 빼어났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 작품다웠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을만한 영화라는 말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이 감독을 만날 수 없었으나 윤정희씨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인터뷰는 한남동 한 사무건물에서 이뤄졌다. 피아노 연습실이 있는 특이한 공간이었다. 윤씨와 휴대폰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남편 백건우씨가 국내 공연을 앞두고 머무는 곳이었다.
백씨의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인터뷰가 이뤄졌다. 소녀 같은 윤씨는 ‘시’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열망했다. 프랑스인의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윤씨는 오래도록 백씨와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다.
“프랑스 친구들은 내가 배우인줄 몰랐다. 그러다 영화 ‘시’에 출연해 촬영을 마쳤다고 최근 말했더니 모두가 외쳤다. ‘칸! 칸! 칸!’이라고. 칸영화제에 가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프랑스 ‘칸’으로
5월12일 칸영화제는 개막했다.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는 모습을 취재해야 한다고 데스크에 보고했다. 적어도 윤씨가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할 것이라며 ‘압박’했다. 1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노배우가 칸의 여왕으로 거듭나는 극적인 순간을 놓쳐서야 되겠냐고 설득도 했다.
출장 결재가 났고 칸으로 향했다. 칸에서의 ‘시’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언론 시사를 마친 뒤 외국 기자들을 붙잡고 물었다. “폭발적인 영화”라는 평가 등 호평이 많았다. 현지 언론의 평가도 좋았다. 우려와 달리 이 감독은 국내 언론들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멀리 취재를 하러 온 국내 언론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이 감독의 마음은 부풀어올라 있었다. 간담회는 화기애애했다.
“2007년 한 지역신문이 ‘밀양’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전도연이 해변에서 일광욕하는 사진을 싣고 ‘주연배우도 (밀양이) 지루해서 존다’는 식의 사진설명을 달았다. 이번에 그 신문은 ‘시’를 ‘내 마음의 황금종려상’이라고 평가했다. 정말 그런 상이 있다면 받고 싶다.”
기대 못미친 각본상 수상
시상식이 열리는 5월23일이 밝았다. 전날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부문 대상인 주목할만한 시선상을 받으며 ‘시’의 수상 기대감도 한껏 올라갔다. 오전 내내 기자들은 바빴다. 영화제 측으로부터 오후 시상식 참석 통보를 받았는지 ‘시’ 관계자들에게 수시로 전화했다. 영화제는 시상 내용을 정확히 밝히지 않는 대신 수상자들에게 미리 연락을 준다. 혹시라도 수상자가 참석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점심 먹을 때쯤 ‘시’가 참석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께 경쟁부문에 진출한 ‘하녀’는 아예 시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황금종려상 수상에 대비한 취재에 들어갔다.
해거름이 되자 영화제 프레스센터로 각국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자리 다툼 속에서 대형 TV화면을 보며 수상 결과를 점쳤다. 유명 영화인들이 속속 시상식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이 감독과 윤씨의 얼굴은 상기됐다.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상을 시작으로 수상자 이름이 연달아 호명됐다. 멕시코 영화가 잇달아 수상했다. 프레스센터의 멕시코 기자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각본상 수상자의 이름이 불리자 한국 기자들은 당황했다. 지나치게 빨리, 예상을 벗어나 이 감독과 ‘시’가 무대 위로 불려졌다. 화면 속 이 감독도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얼떨결에 시상대에 올라가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 준비되지 않은 듯한 말이었다.
황금종려상의 주인은 태국영화 ‘엉클분미’였다. 태국 기자들은 열광했다. 한국 기자들의 얼굴은 굳어졌다. 프레스센터를 빠져나갈 무렵 한 외국기자가 물었다. “왜 그리 시무룩한 표정을 짓느냐”고. “한국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수상하지 못해서”라고 답했다. 외국기자는 자신도 ‘시’를 봤는데 이해하지 못할 수상결과라며 위로했다.
아쉬움 가득한 기자간담회
프레스센터 주변 빈 공간에서 이 감독과 윤씨와의 간략한 기자간담회가 급히 마련됐다. 이동 중에 윤씨의 신발 뒤축이 떨어져나갔다. 주요 상 수상 실패에 따른 당혹스러움에 황망함이 겹쳐 배우의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여보”라며 다급히 구원자를 불렀다. 동행했던 백씨가 신발 뒤축을 들고 아내 뒤를 급하게 쫓았다. 문희 남정임과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며 충무로를 호령했던 노장 여배우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뒤축을 두고 벌이는 해프닝이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간담회 분위기는 숙연했다. 질의응답이 시작되기 전 몇몇 기자들이 위로를 건넸다. 이 감독은 “윤 선생님이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았어야 하는데 저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윤씨는 손사래를 치며 “제가 부족해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깃든 답변들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입장이 엇갈린다 해도 한가지는 명확했다. 영화제 현장에서 느낀 반응 등을 따져봤을 때 각본상 수상은 기대보다 못한 결과였던 게 분명했다. 이 감독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윤씨는 울음을 꾹 참는 듯했으나 목소리엔 물기가 확연했다. 이 감독은 “무엇보다 이곳까지 따라와주신 기자 분들을 실망시켜드려 죄송하다”고 말했다.
간담회가 끝난 뒤 한국영화는 한동안 황금종려상 근처에 가기도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앞으로 황금종려상을 향한 도전은 더 힘들겠다는 예감이었다. 불길한 직감은 적어도 2015년까지 맞아 들었다. 2012년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이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나 빈손으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후 한국영화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이 감독 “기자들 성원에 감사”
서울에 돌아온 뒤 이 감독과 조촐한 술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이 감독은 거듭 칸영화제에서 한국 기자들이 보내준 성원에 감사한다고 했다. 해가 지나 2011년 한국영화기자협회가 주최한 올해의 영화상 시상식에서 이 감독은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그는 예상을 깨고 시상식에 참석해 상을 받은 뒤 수상 소감을 밝혔다. 기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를 통해 그런 인식도 많이 불식시켰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시’는 황금종려상 수상에 실패했으나 이 감독과 기자들 사이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 영화의 또 다른 힘일지 모른다.
<라제기 한국일보 문화부 엔터테인먼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