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그림을 그리다 보면 수시로 고비가 찾아온다. 막막함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고민 끝에 7살 아들의 미술 선생님께 잠시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슬럼프에 빠진 내가 받은 제안은 놀랍게도 ‘오일 파스텔’을 시도해 보라는 것. 쉽게 말하면, 어릴 적 누구나 써봤던 ‘크레파스’로 그려보라는 얘기다. ‘이 나이에 무슨 크레파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신세계다. 쓱쓱 칠하고, 틀리면 그 위에 또 칠하고, 물도 기름도 필요 없고, 간편하기 그지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때론 수채화처럼 영롱하고, 때론 유화처럼 깊은 맛을 내기도 한다. 신통방통 요술이다. 내가 알던 그 크레파스가 맞나 싶다. 특히 무엇보다 나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건 크레파스 특유의 냄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묘한 냄새. 삐뚤 빼뚤 그려 놓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게 칠하려 애쓰던 꼬마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를 맡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냄새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후각의 경험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현상, 이걸 ‘프루스트 효과’라 부른다. 강력하게 형성된 후각의 기억에는 당시의 풍경과 소리, 느낌 등 다양한 정보들이 함께 입력된다. 냄새가 사람을 추억 속으로 순식간에 이동시킬 수 있는 이유다.
“그것은 나를 남부의 고향으로, 복숭아 과수원에서 장난치던 어린 시절로 둥실둥실 띄워 보낸다….” 가을 오후의 햇살과 스치는 바람소리를 느끼지 못했을 헬렌 켈러는 오직 과일 향기에 대한 기억만으로 이 감미로운 풍경을 묘사해 냈다. 냄새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이 때문에 작가들은 냄새를 예민하게 지각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도시 냄새를 세심하게 관찰해 냄새가 어떻게 갖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지에 관해 썼고, 현대 미술가 이우환은 푸르뎅뎅하게 곰팡이가 핀 사과가 방 안에서 새콤달콤하게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죽음이라는 극한의 미학을 떠올리기도 했다. 인간의 감각에 천착했던 미국 작가 다이앤 애커먼은 “어떤 향기가 순간적으로 스쳐 가면 오랜 세월 동안 잡초 더미 속에 감춰져 있던 지뢰처럼 기억이 슬그머니 폭발한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수많은 영상이 덤불 속에서 튀어 오른다”고까지 썼다.
하지만 팍팍한 도시의 삶은 후각을 마비시킨다.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 깊은 냄새를 최근 맡은 적이 있던가. 말초 신경을 유혹하는 자극적인 냄새, 독한 배기가스 냄새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후각을 마비시킨 채 살아온 건 아닐까. 냄새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 가슴 설레는 추억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여름휴가 시즌이다. 해운대 백사장에는 파라솔이 빽빽하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 분명 값진 일이다. 그러나 피서지로 떠나야만 ‘충전’하고 ‘힐링’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 주변의 냄새에 집중해 보자. 향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나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행복한 감정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조용히 앉아 숨을 들이쉬어 본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눅눅한 비 냄새가 사라지고, 가을을 향해 달려가는 여름밤의 냄새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여름밤의 냄새는 훗날 나를 어떤 추억으로, 어떤 행복한 감정으로 이끌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