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나를 바꾸고, 나는 삶을 바꾼다

[스페셜리스트 | 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곧 나올 책의 서문을 쓰다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입학 후 한 학기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떠났던 가족의 이사.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갔던 7세 소년은 이사 당일 증발했다. 포장이사가 아직 미래의 용어였던 시절, 짐 나르느라 정신없던 부모는 아들의 잠적 혹은 납치를 눈치 채지 못했다. 뒤늦게 파악한 사태의 심각성. 생면부지의 동네에서 초등 1학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스마트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1970년대, 당황한 부친과 모친은 미아신고까지 마치고 반경 3㎞ 골목길을 헤집었다.


낙담한 부모의 분노가 두려움으로 바뀌던 그날 밤, 소년은 보무도 당당하게 새 집으로 들어왔더라나. 천연덕스러운 대답. “이 동네 만화가게에는 없는 책이 없어, 엄마.” 부모의 두려움은 다시 분노로 바뀌었고, 초등생 소년은 닥치고 맞아야 했다. 권장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의 구타’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로버트 풀검의 베스트셀러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빌리자면, 나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만화책에서 배웠다’라고 말하고 다니던 소년이었다.


만화로 출발했던 활자 탐닉은 청소년기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시와 소설로 확장됐고, 인문·사회·자연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분방한 독서로 뻗어나갔다. 불치(不治)라고 까지는 할 수 없어도, 이 자발적 활자 중독이 신문사 문화부 기자가 되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의 씨앗과 원천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신문기자 20년, 그 대부분을 문학과 출판을 담당하는 문화부 기자로 지내오면서 하고 싶은 존재증명이 있었다. 무용(無用)이 아닌 유용(有用)으로의 책과 문학. 먼저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는 “무용해서 유용하다”라는 겸손한 표현을 썼지만, 그 역설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지금 시대에 오히려 더 빛난다고 생각한다.


어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만들어주는 의미로서의 독서. 선배들의 숙련이 시시각각 무화(無化)되는 이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시대, 자신의 유용을 입증하려면 인간은 인공지능 알파고와 매번 새로운 대국(對局)에서 승리해야 한다. 가능할까. 당연히 도처에 소외와 분열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찾으려면, 알파고와의 대결로는 불가능한 일. 단순히 레토릭이나 인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시대의 실용적 차원에서도 독서는 필요하다. 의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행복하기 힘들지만, 성취감을 확인하는 순간은 갈수록 줄어드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책은 지속적 존엄을 선물하는 몇 안 되는 예외적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은 그런 의미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바뀐다는 생각은 지극히 낭만적이다. 여기서 낭만적이라는 용어는 순진하다는 말과 동의어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있다. 책상물림의 절름발이 독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마법이 함께 하는 순간이. 책은 나를 바꾸고, 나는 다시 삶을 바꾼다.


통계 인용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서 양극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소득뿐만이 아니라는 수치가 있다. 지식의 빈익빈 부익부. 얼마 전 공개된 2016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한국인 10명 가운데 6.5명이 1년 사이에 종이책을 1권 이상 읽었다. 2년 전에 비해 6% 감소한 수치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 따르면 ‘독서자 기준 평균 독서량’은 2013년의 12.9권에서 2015년의 14권으로 늘었다. 전체 국민 중 책 읽는 사람은 줄고 있지만, 책 읽는 사람들 사이의 독서량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통계가 당신이 독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기를. 더불어 서두에 언급한 새 책에 당신의 관심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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