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해야 할 일이 있다. 글 잘 쓰는 의사들을 편애한다. 아마 시작은 아툴 가완디였을 것이다. 지난해 봄, 그가 쓴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국내에 번역됐다. 가완디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의사. 그의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제목 그대로 ‘인간다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기품있는 문장으로 말한다. ‘기품있는 문장’이라고 했다. 사실 세상에는 의사가 쓴 에세이도 차고 넘치고, 죽음에 관한 책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책들은 단지 의사가 썼을 뿐이었고, 죽음을 소재로 다뤘을 뿐이었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품격있고 설득력있는 문장까지 갖췄을 때의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었다. ‘죽음’에 관한 소재는 조간 신문에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게 불문율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주말 북섹션 톱으로 올렸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1년 반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스테디셀러 리스트에 들어 있다.
지난 주말 북섹션 톱으로 올렸던 책은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될 때’였다. 이 책의 원제는 ‘When Breathe Becomes Air’. 제목이 뿜어내는 향으로 눈치 챘겠지만, 폴 역시 다른 의사들과는 다른 궤적을 그렸다. 스탠포드에서 영문학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 예일대 의대로 갔다. 아툴 가완디는 지금 뉴욕타임스와 뉴요커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폴 칼라니티의 경우는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지난해 3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을 눈앞에 뒀던 신경외과 레지던트 마지막 6년차에, 그는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숨결이 바람될 때’는 일종의 회고록이었다.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된 젊은 의사가 벌인 2년 동안의 사투가 이 안에 있다. 암 환자로서 무력하게 남은 인생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삶을 살아낼 것인가의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폴은 후자를 결심했다. 수술실 수련의로 돌아간 것이다. 찰스 디킨스와 나보코프와 카프카를 사랑했던 전직 영문학도가 엄살도 과장도 없이 한 줄 한 줄 진심으로 써내려간 마지막 인생이 이 안에 있었다.
이 글이 기자협회보에 실리는 날은 8월31일. 그렇다면 한 사람을 더 추모해야겠다. 전날인 8월30일은 올리버 색스(1933~2015)의 타계 1주기였다. 영국에서 태어난 색스는 ‘의학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렸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아툴 가완디나 폴 칼라니티의 멘토 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병례사적(病例史的) 글쓰기로 이름났던 의사였다. 번개를 맞고 갑자기 피아노를 사랑하게 됐던 환자를 첫 번째 사례로 썼던 ‘뮤지코필리아’가 떠오른다. 폴 칼라니티와 마찬가지로 올리버 색스 역시 신경과 전문의였다. 두개골을 열고 말랑말랑한 뇌 속에 9㎝ 깊이로 전극(電極)을 심을 때, 1㎜만 실수하면 환자가 걷잡을 수 없이 슬픔을 느끼는 나노의 세계. 색스는 우리를 한없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해 들어간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신병’이라고 천대하고 외면했던 불편한 세계는 그 안에 없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재능만으로는 인정받기 어려운 세계를 살고 있다.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은 ‘글 잘 쓰는 과학자’가 성공한다고 했던가. 글 잘쓰는 신경외과 의사, 글 잘쓰는 물리학자, 글 잘 쓰는 인공지능 전문가를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들을 위해서나, 우리를 위해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