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 때, 울버린, 그를 인터뷰했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영화 담당기자가 되고 나서 처음 맡게 된 미션이 휴 잭맨을 만나는 일이라니! (인터뷰룸에 들어서면서도 ‘이건 꿈이야’라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던 생각이 난다.) 당시 그는 ‘울버린’이 아닌, ‘독수리 에디’속 ‘브론슨 피어리’로 우리나라를 찾았지만, 그 역시 팬들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알았고,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캐릭터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내가 곧 울버린’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자신있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휴 잭맨, 언제까지고 울버린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덧 17년. 지난 2000년 ‘엑스맨’을 시작으로 ‘로건’까지 9편의 작품에서 ‘울버린’, ‘로건’을 연기한 휴 잭맨은 슈퍼히어로 무비 사상 가장 오랜 시간동안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록을 만들었다. 그가 최초의 울버린으로 캐스팅됐을 땐, 원작 만화 캐릭터의 키가 작았기에 ‘거구’인 그를 향한 우려가 있었지만, 이젠 아무도 그가 아닌 울버린을 상상할 수 없게 됐다.
의지와 상관없이 갖게 된 초인적인 능력 앞에 고뇌하는 영웅,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무비에 늘상 등장하는 줄거리이건만, 난 늘 울버린을 향해선 유독 박수 대신 측은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심정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데 도움이 못되는 능력을 한탄하는 ‘돌연변이’, 하지만 희망을 위한 일 앞에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드는 삶. 현실에는 없는 ‘신의 실수’라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울버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보통의 삶을 지겨워하고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외려 ‘보통날’이 축복임을 느끼게 해주는 숙연함 때문이었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그의 마지막 영화가 시작됐고,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죽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던 그가 쇠약한 알콜중독자가 돼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다니. 주름이 가득 패인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에 가까워진 그였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도움이 없으면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이름 ‘로건’으로 나타난 울버린이 늙어가는 모습에서 이상하리만치 큰 안도감이 느껴졌다.
울버린을 향한 고별사는 꽤 영리했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핏빛 액션에 잘려진 머리가 나뒹구는 ‘청불 액션’임이 분명하지만, 휴 잭맨의 고독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들에 불과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발휘하는 모습에 집중하다보면 그의 몸짓이 슬프기까지 하달까. 딸을 끌어안고 달리는 아버지의 모습, 안티히어로 로건은 전작들의 이야기와 궤를 완전히 달리하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넌 이제 싸우지 않아도 돼” 자신을 닮은 딸에게 놈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선 안된다고 말하는 그는 그 어떤 강력한 힘을 지닌 영웅보다 가장 위대한 인상을 남기고 떠났다. ‘삶’을 찾으려는 아이들을 위한 마지막 몸짓, 예전보다 또렷한 느낌을 주는 영웅의 몸짓이었다. 특별한 능력보단 평범한 삶을 갈망했던 울버린, 그가 끝까지 몸바쳐 지키고자했던 건 역시 희망이었고, 자유였다.
꺼지기 전 가장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휴 잭맨은 ‘로건’을 완벽하게 해냈다. 작별을 고하는 애틋하고 애처로운 ‘안녕’이지만, 그의 마지막은 모두에게 새로운 울버린을 선물했다. 수많은 슈퍼 히어로가 찾아오겠지만, 그를 대체할만한 누군가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