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생명체 내부의 아득한 프로그램 중 하나다. 발생과 분화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야 할 때, 또는 세포가 훼손되어 암세포로 바뀔 수 있을 때 세포자살(apoptosis)이 일어난다. 더 큰 이익, 몸 전체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의 자살은 세포 수준과는 사뭇 다르다. 매우 극단적인 ‘공격’이다. 남은 이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긴다. 에밀 뒤르켕이 ‘자살론’(1897)에서 “자살은 개인적인 요인이기보다 사회적인 사실 때문이다”라고 쓰기 전까지 자살은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그는 유서에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썼다.
노회찬은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외치며 권력형 부패를 비판해온 진보 정치인이었다. 그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일이 없다”는 자신의 말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을 자책했다. 한 정치인은 “그는 염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했다. 장례 기간 동안 전국 분향소에서 7만여명이 조문했다.
죽음은 애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의 반응은 정상이 아니었다. 한 의원의 보좌관은 페이스북에 잔치국수 사진을 올리며 망자를 저열하게 조롱했다. “더 부도덕하고 큰 도둑도 살아 있는데”라며 그 자살을 순결하다고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깨끗한 척하더니 뿌린 대로 거두었다”는 비난도 나왔다.
한국은 으뜸 자살 공화국이다. 만연하는 자살에 점점 둔감해진다. 심지어 자살을 독촉하기도 한다. 지난달 혜화역 페미니즘 집회 참석자들은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사건에 대해 “편파 수사는 아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재기해”라고 외쳤다. ‘재기해’는 여성들이 한국 남성들을 비판할 때 “자살하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한강에 투신해 숨진 남성연대 고(故) 성재기 대표의 이름에서 따왔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쓴 재일교포 정치학자 강상중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 자살자의 열 배쯤 될 것”이라며 “우리 가까이에 그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말을 청하자 그는 “지금 일본의 공기에는 ‘살든 죽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죽더라도 폐는 끼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가 만연해 있다”며 “한국 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정(情)이 강하고 연장자를 공경한다고 알려져 왔는데 지금도 그런가?”라고 반문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우리는 죽지(die) 않고 죽음을 당한다(killed)”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 깊은 고독감과 불신이 팽배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르상티망(복수심)’이 알게 모르게 자살 행동을 부추긴다. 옷깃을 여미고 삶의 방식을 근본부터 돌아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