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긴장된 몸을 풀고 낮게 탄식했다. 우리는 <서치>를 통해 아버지가 딸을 구하는 하품 나는 이야기를 ‘이렇게’도 할 수 있는 시대에 도착했다. 서사는 전통적인데 이를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기법은 참신하다.
정말이지 감탄사 말고는 더할 말이 없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허공에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세상에, 아직도 <서치>를 경험하지 않은 분 있나요? 그게 뭐냐고요? 그러니까….” 그랬다. 이 영화는 ‘본다’가 아니라 ‘경험한다’라고 써야 마땅한 작품이다.
내가 온전히 <서치>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건 먼저 영화를 본 사람들의 ‘보호’ 덕분이었다. <서치>는 지난해 가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다. 그들은 그날 이후부터 정식 개봉되는 날까지 미래의 관객을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노고가 이해됐다. ‘스포일러를 말하지 않고도 영화를 알리기 위해 정말 이를 악물었겠구나….’
<서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봐야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영화를 둘러싼 거의 모든 정보가 스포일러가 된다. 이 영화가 좋으니 제발 꼭 보라고 ‘영업’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조건이다. 한국판 포스터가 다소 조악한 것도 그 때문인 걸까. 영화를 보고 나면 수입·배급사 측의 난감함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지금 내가 난감하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쓰고 있다.
인터넷상의 인연을 아직도 가상 혹은 가짜로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다. 러닝타임 2시간 남짓 영화 한편 전체를 모니터 화면으로만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세계는 온오프라인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모니터 화면만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쪼그라들지 않는다. 이 형식을 통해 오히려 확장된다. 일정 부분 스릴러·서스펜스 장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어떤 폭력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서치>의 미덕이다. ‘없이’도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자들의 재능이 발견된다. 주연배우 존 조, 프로듀서 셰브 오하니, 감독 아니시 차간티는 각각 한국계·아르메니아계·인도계 미국인들이다. 어쩌면 미국 사회에서 누구보다 차별과 폭력에 익숙했을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보란 듯이 빚어낸 성취가 영화 전반에 자신감있게 흐른다. 인종적 정체성을 영화의 정체성으로 삼지 않음으로서 되레 관객들에게 그 지점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서치> 등장인물들이 컴퓨터나 노트북을 사용하는 방식의 단정함이다. 그들처럼 파일과 연락처와 사진이 정돈된 컴퓨터 공간을 내 일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바탕화면에 널브러진 파일들은 더 이상 공간이 없어 겹쳐 존재하고, 사진은 내키는 대로 ‘dddffeee’ 따위 이름으로 저장해놓는 내가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면? 실종의 단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들이 떠올라 숙연해진다. 내 컴퓨터엔 별 거 없으니 <서치>처럼 애쓰지 말라고 미리 써둘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