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기자들 실화 소재로 한 소설·르포논픽션 잇따라 출시

취재 확장한 저널리즘 실현… 팩트 다루는 기자들, 작가 가능성 엿보여

국내 전·현직 기자들이 잇따라 르포논픽션·전기를 출간하고, 실제 경험에 바탕한 소설·웹소설을 선보여 주목된다. 실화에 기반한 스토리가 콘텐츠 시장에서 환영받아 드라마·영화 제작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늘어나는 가운데 팩트를 다루는 기자들로선 작가로서 가능성을 엿볼 여지가 커지고 있다. 심도 있는 취재를 확장한 저널리즘 실현 방식으로써, 콘텐츠 기업이 수익을 도모하는 방안으로써 언론사의 대응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오승훈 한겨레 기자는 연예계 대표 미제사건인 힙합 듀오 ‘듀스’의 김성재 변사 사건을 다룬 논픽션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를 최근 출간했다. 지면제약 상 신문·잡지엔 담기 어려운 1년 반의 취재내용을 담으며 공적 의미가 배가됐다. 수사공판 기록과 당시 기사 등 3000쪽 넘는 문서가 검토됐고, 피고인 2심·구속적부심 변호인 단독 인터뷰 등이 실렸다. 실화모티프 스토리 전문기획사이자 한겨레 사내벤처였던 팩트스토리의 기획제안, 공동취재로 쓰인 법정 르포물은 10회분 축약본으로 한겨레21에 실렸고, 이후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됐다.

전·현직 기자들이 실화에 기반한 르포논픽션, 소설, 웹소설을 잇따라 내놓고 영상화되는 사례도 나오면서 언론사들에 과제를 남긴다. 사진은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승훈 한겨레 기자의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 손대범 전 점프볼 편집장의 <오른손을 묶어라>, 무정영 작가(문영수 아이뉴스24 기자)의 <오프더레코드>, 정진영 작가(전 문화일보 기자)의 <젠가> 등 출간 사례.


초고단계에서 드라마제작사와 선판권판매 계약을 맺었다. 또 다른 계약사인 MBC는 ‘다큐플렉스’ 방송으로 영상물을 이미 선보였다. 오 기자는 “사건의 결론은 알지만 수사와 공판과정이 어땠는지를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경찰 초동수사와 검시제도 문제점, 나아가 한국 형사사법 시스템의 선택적 정의 문제까지, 무죄가 나온 과정에 공적인 의미가 있다고 봤다”고 했다. 이어 “우리 언론에선 기자가 특정 사건을 장기 취재해 논픽션을 내는 경우가 영미권에 비해 드물다.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보듯 실화 시장은 있지만 논픽션 시장은 협소하다. 관심만 있지 수원지가 없는 상태에서 1년 반을 들여 결과물을 낸 뿌듯함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현직 기자들이 관심분야나 지식, 취재경험을 살려 르포논픽션을 내는 명맥은 있어왔다. 지난 4월 손대범 전 점프볼 편집장은 전규삼 전 송도고 농구부 코치의 전기 <오른손을 묶어라>를 출간했다. 이기문 조선일보 기자는 ‘배틀그라운드’ 신화를 이룬 게임회사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크래프톤 웨이>(7월)를 선보였다. 이수경 전 기자는 지난 7월초부터 카카오페이지에서 논픽션 <지존파 강력반장 고병천>을 연재 중이다. 기자 저자의 실화 소재 소설도 다수 나왔다. 기자 세계를 다룬 송경화 한겨레 기자의 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는 드라마 판권 계약을 했고, 언론사·기업 내부를 다룬 정진영 소설가(전 문화일보 기자)의 <침묵주의보>, <젠가>는 드라마로 제작됐거나 영상화를 앞뒀다.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재심을 기록한 박상규 셜록 기자의 <지연된 정의>가 지난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실화 소재가 환영받는 상황에서 기자들의 ‘취재 역량’은 유용한 무기가 된다. 정진영 소설가는 “잘 취재가 안 되는 업계를 다룬 <젠가> 땐 자연스레 고등법원 판례, 원자력 업계 논문, 보고서를 찾아 읽었다. 국회를 다룬 내년 차기작은 국회의원과 보좌관을 취재했다”며 “머리로만 생각지 않는 태도는 소설 속 일에 개연성을 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렇게 취재해서 쓰이는 소설이 잘 없기도 하다”고 했다. 다만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기 위해선 기록 차원을 넘어 인물·사건 중심의 내러티브 구성, 문장과 리듬에 대한 고민, 플랫폼 및 독자특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추리, 공포, 미스터리로 다수 공모에서 수상한 무정영 작가(문영수 아이뉴스24 기자)의 웹소설 <오프더레코드> <언터칭> <뉴 메타> 등은 일반 소설과도 완연히 다른 리듬감을 보여주는 경우다.


언론으로선 비교 우위에 있고 타 콘텐츠의 원전이 될 수도 있는 르포논픽션, 전기 등 ‘이야기형 논픽션’이 간과돼 온 지점을 돌아봄직하다. 의욕 있는 기자들의 장기취재 제안이 ‘한가한 소리’로 치부되거나 데일리 업무에 밀리는 일은 흔하다. 그렇게 기획기사 형식은 천편일률적이고, 정작 기사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기지 못하고 있다.


‘지옥고 아래 쪽방’ 기획을 지난해 <착취도시, 서울> 책으로 출간한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는 “100만큼 취재하고 50만큼 쓰라는 말이 있지만 제 입장에선 나머지가 사장되는 게 아쉬워 취재과정을 더해 책을 썼다. 기자는 기사로만 말해야한다는 인식이 기자 영역확장에 제약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사에서 사실 중심으로 문제의식을 얽어나갔다면 책에선 장면 중심으로 ‘나’를 등장시켜 자유롭게 썼고 같은 등장인물인데도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얘길 해주시더라”고 부연했다.


해외에선 프로퍼블리카의 기사를 묶은 책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넷플릭스에 오르고, 뉴욕타임스가 자사 기사를 다큐<프레이밍 브리트니>로 만들어 화제가 됐다.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는 “실화 관련 콘텐츠 시장에서 드라마·영화는 단단한 마켓셰어를 확보하고 있다. 웹툰에선 전문직역 소재나 범죄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소비되고, 가장 팩트 모티프가 미약했던 웹소설에서도 전문직역 소설 시장이 커지는 상태”라며 “내러티브 기획기사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탐사보도팀이나 주간지 상황이 좋지 않은데 공익성 차원을 넘어 수익성 측면에서도 논픽션은 콘텐츠 혁신 방안이 될 수 있다. 매력적인 글쓰기 장르이고 다른 장르로 확장될 수 있는 시장성의 고리를 갖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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