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저지, 사장 퇴진운동, 제작거부….
최근 우리나라의 대표적 공영방송인 KBS 사장 대부분이 통과의례처럼 겪은 일이다. 민주화 이후 거대 정당 간 정치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권력이 바뀔 때마다 정권에 종속됐던 공영방송의 씁쓸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KBS, MBC, EBS와 같은 공영방송은 예외 없이 정권에 따라 편향보도 시비에 휘말렸다. 공정하고 다양한 가치를 구현해 민주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공영방송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공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선 조직 구성원들이 온 힘을 모아도 부족한데 내부 분열로 가진 역량마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위상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는데 선진국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언론자유의 획득이 우리에게는 요원한 과제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와 언론학자들이 오랫동안 언론개혁의 핵심과제로 공영방송에서의 정치권력 영향을 배제하는 ‘지배구조 개선’을 주장해왔던 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야당일 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혁법안을 냈고 대선 때는 공약까지 냈던 문재인 정부가 임기 5년 동안 이 문제를 오불관언한 건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정권 초기인 20대 국회에서는 ‘대통령과 집권여당-방통위-이사-공영방송 사장’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공영방송 사장을 임명할 때 특별다수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개혁 법안이 발의된 일도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라며 재검토를 지시, 법안 좌초를 사실상 방조한 일이 있다. 말로만 ‘촛불정부’를 자임한 정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주당이 지난달 말 공영방송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안(방송통신위원회법, 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교육방송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지만 만시지탄이다. 법안 내용은 KBS, MBC, EBS의 경우 특정 성별이 70%를 초과하지 않는 25명의 운영위원을 임명하고 이들이 사장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한 것이다. 국회는 운영위원 중 8명의 추천권한만 있고 나머지 위원들은 방송 및 미디어학회, 시청자위원회, 시도의회의장협의회 등에서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미흡한 점도 있지만 정치권의 몫을 3분의 1로 대폭 축소한 점은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다양성과 전문성 강화, 시민참여라는 시대적 가치에 부응한다는 점도 평가할만하다. “공영방송을 이끌어가는데 필요한 리더십을 검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전국언론노조 KBS본부), “공영방송의 통제권을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 주려고 노력한 점에서 현실적 대안으로 본다”(전국언론노조 MBC본부) 등 공영방송의 구성원들이 이번 법안에 대체로 환영을 표시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관건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와 관련해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입장을 바꾸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느냐이다. 특히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정권을 되찾은 보수야당이 정권을 빼앗기고 난 뒤에야 지배구조 개혁안을 내놓은 민주당의 법안을 흔쾌히 여길 가능성은 낮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윤석열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3일 국정과제로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과 신뢰성 확보를 위해 이사회 구성 및 사장 선임 절차와 관련된 방송관계법의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공영방송을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고 좌지우지하려는 유혹을 먼저 떨치는 쪽이 국민의 박수를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정치권은 명심하고 속히 법 개정에 나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