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송건호 선생은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글을 썼다. 그의 책과 글 어디에든 ‘민족’ 또는 ‘민족주의’가 주제어로 등장한다. 그의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가치지향적’이다. 1986년에 한길사가 펴낸 <민족통일을 위하여>에 수록한 긴 글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는 저간의 선생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으로부터 이루어진 생각을 종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를 통찰하는 지식인의 자세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송건호는 서구의 것들을 열심히 읽고 또 이야기했다. 그러나 4월혁명을 지나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1967년 ‘한국지식인론’을 발표함으로써 거센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한 사회과학도로서의 반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장문의 에세이에서 선생은 미국 등지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학자들의 민족 현실에 대한 반역사성·몰역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회과학적 가치 및 역사적 전통과 가치를 배제하는 미국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면서, 기계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지성을 겸비한 실천성을 요구한다.
“학문세계가 현실을 무시하고 초연하게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막연히 선진 외국학설을 소개·나열하는 것으로 자기의 권위를 찾고, 기껏 현실분석이라고 해야 외국이론으로서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을 유일한 현실인식인 것처럼 말한다면, 이 땅의 위기상황은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없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박정희의 5·16 군사정권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송건호 선생은 “이 땅의 지식인이 사회참여에만 열중하고 문제의 핵심인 ‘지성’의 사회참여에 대해선 너무 등한시한 감이 많았다”면서, “기능적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역사적 본질을 꿰뚫는 ‘지성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선생은 지식인 또는 지성인의 지조를 매우 중시한다. “지조와 논리를 파는 이른바 참여지향적 지성 또는 현실을 은폐하고 합리화시키는 사이비 지성”을 크게 비판한다. 그에게도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와 요청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한 언론인으로서 한 지식인으로서의 자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면서 글 쓰는 행위를 삶의 당연한 도덕적・윤리적 질서로 고수해왔다. 그의 이러한 삶과 삶의 철학은 그를 권위주의 정치체제 또는 유신체제를 거부하는 민주주의 운동, 민족주의 운동의 현장에 서게 했고, 글과 행동으로 말하고 실천하게 했다.
남산의 지하 감방에서 두 달 동안 혹독한 고문당해
1980년 봄날 송건호·유인호 선생이 그해 5월15일에 발표하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원고를 갖고 우리 출판사에 들렀다. 그때 한길사는 서대문 네거리 근처의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창고 공간을 빌려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우리 사무실에서 필경하고, 해직교수이자 민중신학자인 서남동 선생이 원장으로 있는 선교교육원 사무실에 가서 선생들이 등사하는 일을 도왔다.
“비상계엄령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학원은 병영적 성격을 청산하고 학문의 연구와 발표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언론의 독립과 자유는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 부당하게 해직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들은 지체 없이 복직되어야 한다. 민주인사에 대한 석방·복권·복직 조치는 지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국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 한 사람이 국군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시정되어야 한다.”
이 시국선언은 언론인 송건호의 행로에 큰 사건이 된다. 1980년 5월20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가는 것이었다. 다시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감방으로 끌려간다. 두 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허위 자백을 하고 허위 자술서를 써야 했다. 체포되어 고문 받는 연유도 몰랐다. 재판정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의 공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아!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민주주의 하자는 죄밖에 더 있나?
한 민족으로서 떳떳하게 자주적으로 살아보자면서
민족주의를 주장한 죄밖에 더 있나?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심약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1986년 선생은 회갑 때 쓴 ‘이 땅의 신문기자, 고행의 12년’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1심에서 징역 3년 6월,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80년 11월6일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몸은 고문으로 심하게 상해 있었다. 2001년 선생이 서거하는 원인이 되었다.
언론인 송건호의 실천적 삶은 눈부셨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혹독한 감옥살이를 겪었지만, 1980년대 언론인・지식인으로서의 송건호의 정신과 실천적인 삶은 실로 눈부셨다. 민주주의 세력은 그의 정신과 이론을 요구했고, 그는 나라와 민족과 사회의 민주주의와 민족정신의 고양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선생은 월간 ‘마당’ 1981년 9월호부터 김구·여운형·김창숙·안재홍·함석헌 등 민족지도자들의 인물론을 연재했다.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 선생의 <심산유고>를 읽다가는 감격했다. 눈물이 떨어져 원고를 적셨다. 도봉산 자락 심산의 묘소를 찾아가 엎드려 울었다. 이 연재는 정리되어 1984년 한길사에 의해 <한국현대인물사론>으로 출간되었고, 이 저술로 선생은 1986년 제1회 심산상을 수상했다.
선생은 동아일보사 퇴직 후 박정희로부터 장관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그런 정치적인 자리는 한사코 거부했다. 전두환 시기에도 서울시장 고문 등 10여 차례의 제의가 있었지만 역시 거절했다.
“역사의 길이란 형극의 길이자 수난의 길이다. 온갖 세속적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역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길을 걷는다. 현실의 길은 안락의 길이자 세속적 영화의 길이다. 현실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갖가지 명분을 내세운다. 그 길이 민족을 위하는 길이고 독립을 위하는 길이며 통일을 위하는 길이라고 강변한다.”
선생은 ‘나의 좌우명’이란 짤막한 글에서 스스로의 글 쓰는 자세를 말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30년, 40년 후에 과연 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먼 훗날에도 욕먹지 않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사람의 말대로, 크게는 이 민족을 위해서, 작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서, 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84년 12월 장충동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창립되고 송건호 선생은 의장에 취임한다. <말>지가 창립된다. 1987년 동아·조선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언론창설 연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고, 9월23일 ‘새신문 창간 발의자 대회’에서 선생은 새신문 창간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이어 10월30일 명동 YWCA 대강당에서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선언대회’가 열린다. 11월2일부터 국민모금운동에 들어갔고 드디어 1988년 5월15일 한겨레가 창간된다.
불가능하다던 국민신문 한겨레의 탄생에는 ‘독립언론인 송건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송건호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신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창간호가 발행되던 그날 발행인으로서 선생은 편집국 기자들에게 “무슨 문제든지 여러분이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 다 쓰십시오”라고 선언했다.
1980년대 한국인과 한국사회가 구현해낸 탁월한 걸작품 한겨레신문! 자유언론·독립언론에의 간절한 국민적 소망이 조직화되어 창간된 한겨레는 한국 사회운동의 가장 빛나는 성과였다. 나는 한겨레신문의 탄생을 이끈 송건호 선생의 ‘실천적 육성’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길사가 펴내던 월간 ‘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호에 나는 선생을 특별 인터뷰해서 실었다.
‘기자협회보’ 선정 20세기 최고의 언론인
국민들의 참여에 의한 새 언론 한겨레신문의 창간과 함께 송건호 선생은 신문사의 대표이사로서 일하게 되었지만, 선생은 대표이사를 맡아 하면서부터 고뇌도 많았다.
나는 선생이 한겨레신문의 대표이사가 되면서 자주 뵐 수 없게 되었지만, 이따금씩 뵐 때 선생의 얼굴에는 우수가 서려 있는 듯했다.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본격적인 글을 쓸 수가 없어 안타깝다는 말씀도 했다.
1980년대 한길사가 펴내던 무크지 ‘한국사회연구’와 계간 ‘오늘의 책’에 선생은 우리 현대사에 관한 큰 글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나는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를 크게 한번 써보시라고 계속 말씀드린 바도 있었다. 우리가 펴내고 있던 잡지 등에 연재를 시도했지만, 한겨레신문 창간 일로 제대로 진전되지 못했다. 선생은 그 일을 늘 마음의 부채로 생각했다.
송건호 선생은 1999년 ‘기자협회보’가 전국에 있는 신문·방송·통신사의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20세기 한국의 최고 언론인’으로 위암 장지연 선생과 함께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선생은 8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송건호 선생의 정신과 실천을 기리기 위해 ‘청암언론문화재단’이 2002년 1월에 창립되었다. 선생의 아호 청암(靑巖)을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 이어 같은 해 청암언론문화재단은 한겨레신문사와 공동으로 송건호언론상을 제정했다. 장남 송준용씨가 이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선생이 서거한 12월에 시상된다.
2002년 12월 선생의 서거 1주년을 맞아 나는 <송건호전집> 전 20권을 펴냈다. 강만길·김태진·리영희·방정배·백낙청·성유보·이문영·이상희·이해동·정연주·한승헌·김언호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나는 간행사를 초했다.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엄혹한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극복하면서 개진해낸 선생의 치열한 정신과 사상과 논리는 오늘 새롭게 진전되고 있는 국가 사회적 상황과 통일 지향적 민족공동체 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더불어 한층 새롭게 우리들 가슴에 다가온다. 우리는 선생이 남긴 수다한 저술을 통해, 민족언론인·민주언론인·독립언론인 송건호의 참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선생이 남긴 저술을 통해 언론인으로서뿐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송건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선생은 현실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지식인의 진정한 정신과 행동을 몸소 보여주었다.
한 시대에 지식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특히 분단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민족지성이란 무엇인가를, 선생이 남긴 저술들을 통해 우리는 가슴 벅차게 체험하게 된다.”
출판인은 책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1987년 5월16일 토요일 오후 송건호 선생은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나는 그날 강연을 끝낸 선생을 모시고 저녁을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나에게 진지하게 말씀했다.
“출판인은 좋은 책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것이 출판인의 본분입니다.
출판인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은 그렇게 강조했다. 송건호 선생은 나에게 개헌을 위한 서명 같은 데 참여할 것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했다.
2008년 12월 한길사는 ‘참언론인 송건호의 생각과 실천’을 이야기하는 책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를 펴냈다. 소설가 정지아씨가 취재해 썼는데 선생의 7주기에 맞추었다. 언론인이자 역사저술가인 송건호의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선생은 책을 늘 손에 들고 있었다. 선생과 만날 때 선생은 가난한 언론인이었지만 늘 책을 구입했다. 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책 사는 것이 사모님께 미안해서, 귀가할 때 사들고 온 책을 마당 한구석이나 나무 밑에 놓아두었다가 나중에 집 안으로 슬쩍 갖고 들어온다는 말씀을 사모님 이정순 여사로부터 들었다. 그렇게 사모아 읽은 책이 1만 5000권이나 되었다. 이 장서는 1996년 한겨레신문에 기증되었다. 한겨레신문은 ‘청암문고’로 이름지어 이용하고 있다.
선생과 만남의 장소는 거의 인사동 통문관이었다. 고서들을 살펴보다가 어디로 옮겨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했다. 선생과 책을 이야기하거나 우리 현대사 이야기를 듣던 그 70년대 80년대! 고단한 시대였지만 즐거웠다.
추운 겨울은 봄을 오게 한다
송건호 선생의 고향 옥천은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의 고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옥천에 주간 ‘옥천신문’ 이 발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주목한다. 한겨레신문보다 한 해 뒤인 1989년에 지역 주민들의 모금으로 창간한 ‘작은 신문’ 옥천신문은 지역 시민들에 의한 지역을 위한 참신문이다. 중앙의 거대 신문에 대응하여 풀뿌리신문으로서 지역공동체와 지역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송건호 선생의 언론정신과 더불어 옥천신문을 우리는 새롭게 보게 된다.
나는 산과 들에 꽃이 피는 봄날이면 1980년 그 ‘서울의 봄’이 나의 머리에 선연히 떠오른다. 나라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를 향해 행진하던 그 봄날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꽃향기가 진동하는 화창한 5월의 그 봄날, 나는 송건호 선생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서대문 충정로의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지식인 134인의 시국선언을 주도하던 송건호 선생을 도와 그 선언문을 등사해내던 그 봄날이 그리워진다.
그해 서울의 봄은 새로운 역사가 꽃피던 계절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그 봄날의 꽃들은 무참하게 짓밟혔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의 정신은 결코 좌절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고 정신이었다. 우리의 희망과 정신은 고난을 이기는 힘이었다.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운동이고 사상이었다.
“나는 역사의 길을 걷겠다”던 송건호 선생의 신념에 찬 말씀이 내 가슴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온화하고 자상하던 송건호 선생!
“우리나라의 겨울은 춥다.
흰 눈이 하늘을 덮고 영하 10도 15도까지 내려가는 날은
정말 견디기 어렵게 춥다.
아무리 추위가 맹위를 떨쳐도
봄은 결코 멀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알고
인내와 용기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어김없이 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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