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차별없는 세상, 개인 선의만으론 안 된다

[언론 다시보기] 정진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소장

정진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소장

4월1일, 내가 쓴 기자협회보 칼럼 제목이 <우리는 혐오와 배제, 차별을 가르고 광장을 채운다>였다. 내란청산 사회대개혁비상행동의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평등하고 안전한 집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단지 집회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가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애씀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4월4일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은 파면되었고, 지금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부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시작점에 서 있다. 시민들은 그동안 산적해 있던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사회를 바꾸자고 요구했고, 각 대통령 후보들은 공보물과 연설, 그리고 토론회 등을 통해 자신의 공약을 발표하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참담한 사건이 벌어졌다. 5월27일 대통령 후보 3차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성폭력적 발언을 내뱉었고, 이 말이 생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송출된 것이다.


그 토론회를 보며 제일 먼저 떠올린 질문은 ‘토론회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였다. 대통령의 내란으로 갑자기 치러진 대선이었다. 윤석열을 파면하고 세상을 바꾸자고 겨울 내내 광장에서 외친 시민들 덕분에 치를 수 있게 된 선거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온 이가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이 겪을 수 있는 폭력을 대상화하고, 현장의 참석자와 TV 토론회를 보고 있던 유권자 모두에게 언어 성폭력을 저질렀다. 한 명의 유권자, 여성으로서 모욕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두 번째 질문이 따라왔다. ‘어떻게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저 말이 걸러지지 않았지?’이다. 첫 번째 질문이 대통령 후보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자질에 대한 의문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명백한 혐오표현이 전혀 컨트롤되지 않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지만, 그날 토론회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 자리에는 각 후보뿐 아니라, 사회자가 있었다. 주제에 맞지 않는 토론으로 방향이 옮겨가거나, 일부가 발언권을 독점하거나 토론이 쏠리지 않도록 진행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당일 토론회의 주제에도 부합하지 않고, 성폭력·성희롱적 발언이 방송을 통해 송출되고 있는데도 사회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조차도 유권자들의 판단 영역이었기 때문에 제지하지 않았던 건가 하고 추측을 해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발언의 심각성을 고려해 해당 내용이 정리될 때나 전체 토론회를 마무리할 때라도 설명을 붙여야 했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 사회자의 역할이 후보들의 남은 발언 시간을 알려주는 타이머가 아니라면 말이다.


한두 명만 이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닌가 보다. 기자협회보 보도에 따르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는 이번 토론회 주관방송사인 MBC를 징계해 달라는 민원이 700여 건 접수됐다고 한다.


지난 칼럼에서 썼듯, 잠시 내란청산 사회대개혁비상행동 상황실에 파견돼 집회를 주관했었다. 집회 때마다 가장 신경 써서 전달하고 수시로 확인한 것은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마이크를 타지 않도록 발언자·공연자에게 안내 사항을 전달하고 점검하는 거였다. 활동가든, 국회의원이든, 시민이든, 공연자든 마이크를 쥔 모두에게 발언자 가이드라인을 전달하고 잘 보이는 곳에 부착했다. 이를 어긴 발언자에게는 사과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다못해 급히 만든 연대체인 비상행동 상황실도 혐오표현 없는 광장을 위해 시스템을 만들고 노력하는데, 생방송 TV 토론회를 주관하는 공영방송사와 선거관리위원회가 이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쯤 된다면 저런 발언을 할 리 없다는 믿음과 한 적도 없다는 이력 때문에 시스템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번 토론회로 확인되었다. 생중계 토론에서 혐오표현을 하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시스템이 충분치 않다.


지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차별을 막고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는 개인의 선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배제와 혐오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인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의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혐오표현에 거리낌 없는 대통령 후보도 나와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그대로 송출되는 방송 또한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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