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기사 읽기가 두려운 이유
몇 년 전만 해도 언론에 쓰여지지 않는 노동에 대해 자주 한탄하곤 했다. 매일 노동자가 일터에서 다치고 죽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파업을 해도 기사 한 줄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간혹 대공장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면 귀족노조 프레임을 덧씌우는 기사들이 사회면 톱기사를 장식하는 정도였다.그런데 최근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노동, 그리고 노동조합 기사가 그야말로 쏟아져 나온다. 사회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종합면, 경제면, 논설 꼭지에 이르기까지 지면도 다양하다. 다만 기사의 톤은 매우 획일적이다. 노
노란봉투법과 언론의 역할
노동의제를 대하는 언론의 관점을 보고 있을 때면 몹시 걱정스럽다. 이번에는 이른바 노란봉투법을 두고 각 언론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하나의 법안을 두고 여러 주체들이 각자 의견을 내어 토론하는 것은 민주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다. 언론은 이때 각 주체들과 사회 구성원들에게 다각도에서 조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사회가 보다 더 공익에 부합하는 이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언론은 지금 그 역할을 잘 하고 있을까? 도리어 언론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는 판단을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2월11일부터
검찰 받아쓰기와 게으름
1920년대 독일에서 법조기자는 창의적 글쓰기를 못 하는 무능한 글쟁이로 평가받았다. 최고 학벌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법률가와 비교하면 법조기자는 검찰 기소장이나 베끼는 건달에 불과했다. 그들은 검찰 기소장과 법원 판결문을 요약한 기사에 자기 이름을 다는 정도로 법률가와 동급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이러한 관행을 깨고 법조 보도의 전형을 만든 사람이 파울 슐레징어(1878~1928)였다. 그는 매일같이 베를린 형사법원 방청석에 앉아 범죄가 발생한 환경과 사건의 전개 과정을 재구성했다. 때로는 증거를 따라서 현장도 찾았다. 예나 지
'언론윤리'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얼마나 윤리적인가
김만배씨와 기자들의 거액 돈거래를 계기로 언론윤리가 다시 많이 거론된다. 많은 언론이 언론윤리의 추락을 개탄하고, 특집 보도도 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언론윤리 문제를 너무 사건화하는 건 아닐까?언론윤리 문제의 사건화를 걱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종종 언론윤리 문제의 복잡성과 구조적 측면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사실관계가 충분히 드러나기도 전에 평가를 끝내고 금방 어딘가에서 터질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윤리 문제가 어느 언론사, 나아가 어느 언론인에게나 문제가 될 수
문제가 만연한 시대, 언론의 역할
만 9년을 못 채운 채 기자를 그만두고 정책연구자란 정체성으로 지낸지가 5년 가까이 지났다. 현직 때보다 기자의 일은 언론계에서 통상 인식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저널리즘이 위기란 말이 나온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기자란 직업의 명칭은 멸칭으로 더 자주 호명되는 이 시대에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공론장에서 다뤄진만큼 진전이 있든, 퇴보를 하든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공론장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모색하게 한다. 대안이 정책으로 실행된 뒤에 효과…
지워진 장면들에 대한 의도적 기록
많은 투쟁이 숫자로 기억된다. 몇 년간의 복직 투쟁, 몇백일의 고공 농성, 몇십일의 단식.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투쟁 또한 1842일의 광화문농성으로 회자된다.시간의 길이는 투쟁의 절실함을 어느 정도 드러내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지루한 하루를 견뎌냈을 사람들의 피로와 땀내, 잦은 막막함과 종종 찾아오는 연대의 환희와 같은 지난 시간의 구체적 경험이 그 숫자에는 없다. 그 시간을 언론도 보도하지 않는다. 보도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알 수 없고, 과정을 삭제한 결과 중심의 보도는 단지 싸움의 승패만을 알릴 뿐이다. 여기에는 언론의 습
적대의 시대 언론의 역할
2022년 8월,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와 이코노미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43%가 10년 내 미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미국인이 내전을 걱정하게 된 것일까?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따르면 그 주된 원인은 미국 정당정치의 양극화에 있다. 특히 1990년대 공화당 지도부였던 뉴트 깅리치의 극단주의가 시작이었다. 깅리치는 민주당을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하도록 공화당원들을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하원의장이 된 이후에는 아예 민주당과 타협불가를 방침으로 정했다.깅리치 이후
신문 수익모델과 온라인 뉴스 페이월
저널리스트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비즈니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전통적인 저널리스트에 대한 설명은 유명한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조판을 가르치고 경영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저널리즘 학교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저널리즘은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넘어 반상업적이어야 하며, 오히려 필요하다면 비즈니스를 희생하며 사회적 지식과 문화를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뉴스 제작을 위한 기술에 무지하고 수익 구조에 신경 쓰지 않는 저널리스트가 가능할까?워렌 버핏은 1
과거사에 대해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일본은 사과를 하지 않는가?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과거사에 대해 왜 사과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한번도 안 한 건 아닌데라고 답하면 가끔 그럴 리가 없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사과는 했지만 그걸 부정할 만한 일본 정치인의 발언이나 태도 때문에 사과를 못 받은 것처럼 느낀다라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사과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해라고 되풀이하면 일본 쪽에서도
영화제가 영화상영회가 아닌 이유
필자는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Community Biff)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관객이 직접 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다양한 부대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행사인데,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상영하고 이후 박찬욱 감독과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대한 관객 독서 토론을 진행하거나 지역 주민들과 연계해 함께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기도 했다. 동네방네 비프는 영화제가 지역민의 생활 공간 거점을 직접 찾아가는 행사다. 기존 해운대나 남포동 같은 곳을 벗어나 범어사, 유라리 광장, 차이나타운 등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