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세월1] ‘도둑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 - 언론화형식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구나. 53년 전(!) 1971년 3월25일, 동아일보사 출판국 기자 입사 넉 달 지난 수습 시절. ‘월간 신동아’ 말석이던 나는 본관 건물(지금의 일민미술관. 동아일보 편집국, 공무국, 동아방송이 있던 5층 건물) 2층에 자리한 공무국에 동판 제작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당시 출판국은 지금 동아일보 새 건물 자리에, ‘별관’이라 부른 낡은 2층 목조 건물에 있었다. 별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에는 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꽤 넓은 정방형 베란다가 있었다. 그 앞쪽이 광화문 광장.
그날은 봄 햇살이 조금은 도타워지던 이른 봄날, 2층 공무국에 동판 제작을 맡기고 별관으로 돌아가려는데 베란다 너머 광화문 쪽에서 구호 외치는 소리가 났다.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텐가’라는 플래카드를 펼쳐 든 대학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엄혹하던 시절, 서울대 문리대생 50여명은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발표하고, ‘언론화형식’을 가졌다. 득달같이 달려온 경찰에 모두 잡혀갔다.
“나오라, 사이비 언론인들이여, 나오라, 이 민주의 광장으로 나와 국민과 선배들에게 사죄하라. 선배 투사들의 한 서린 해골 위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 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제를 일삼는 자들이여! 안타깝다...민주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들만 들끓는가.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 (‘자유언론 40년 – 실록 동아투위 1974-2014’ 75쪽)
[세월2]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폭압적 독재정권에 재갈 물리고, 자기검열에 철저했던 언론을 향해 ‘잡귀들이 들끓는’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라는 질타와 분노를 쏟아내던 언론화형식 현장을 목격한 ‘그 봄’ 2년여 뒤, 나는 출판국 신동아부에서 편집국 사회부로 옮겨졌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유난히 대학들이 많이 모여있던 동대문 경찰서 ‘나와바리’(동대문, 성동, 북부 경찰서 관할. 이 지역에는 서울대 문리대·법대 등 동숭동 캠퍼스, 고려대, 성균관대, 한신대, 서울대 상대 등이 있었음)를 맡게 되었다.
사회부로 옮기기 전 2년여 사이 박정희 군부독재는 무지막지하게 치달았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옥내외 집회 금지, 대학 휴교령, 언론 사전 검열, 정권 꼭두각시 집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접선거(임기 6년) 실시, 대통령 중임·연임제한 철폐 등을 골자로 한, 박정희 ‘영구집권’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첫 통일주체국민회의(1972.12.23)에서 대의원 2359명 투표, 2357명 찬성, 무효 2명, 찬성 99.9%로 박정희가 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6년 뒤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1978.7.6)에서 대의원 2578명 투표, 찬성 2577명, 무효 1명, 찬성 99.9%로 다시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터널 끝이 보이지 않던 칠흑 같은 암흑시대, 영구집권 체제를 굳힌 박정희 정권은 두려울 게 없었고, 공포정치는 일상화되었다. 유신체제 이듬해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야당 지도자를 백주에 납치하여 현해탄에서 수장·살해하려 했고, 이듬해 1월에는 긴급조치 1·2호를 발동, 개헌 논의를 금지시키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뒤이어 4월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 민청학련 사건과 그 배후 세력으로 혹독한 고문으로 조작한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인혁당 관련자 8명은 이듬해 봄, 처형당했다. 사법살인의 피해자인 이들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무도한 시절, 유신체제 1년 동안 죽음 같은 공포가 지배하던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데모가 터졌다. 그 시위가 촉발제가 되어 대학가에는 데모가 번지기 시작했다. ‘동대문 나와바리’는 대학가 데모 소식으로 ‘바빴다’. 데모 현장에서, 또는 (대부분) 경찰이 덮쳐 상황이 끝난 데모 현장에 뒤늦게 가서, 성명서 등을 챙기는 ‘뒷북 취재’에 바빴다. 그러나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의 동아일보 담당 ‘방 중령’이 ‘최고 편집자’인 양 돌아다녔고, 그의 말 한마디, 아니 ‘여기 남산’이라는 전화 한 통화에도 기사가 사라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런 일이 있기 전, 나의 선배들은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남산’에 끌려가 치도곤당했다. 자기검열은 연탄가스처럼 우리 속에 스며들어 DNA가 되어있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내 모교인 서울대 상대에서도 데모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종암동에 위치한 캠퍼스에 가보니, 데모 상황은 끝나고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농성 중이었다. 나는 데모 현장에서 나온 성명서라도 얻으려 도서관 입구에 접근했다. 경찰 접근을 막기 위해 의자들을 잔뜩 쌓아 놓았다. 그 위로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나는, 우리 기자들 기자는 ‘개’였다. 단순한 발생 기사 하나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기자’가, ‘언론’이 무슨 사회의 목탁(木鐸)이며, ‘말’을 논하는 존재, 언론이란 말인가. 그 팻말 앞에서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벼랑 끝까지 밀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 깊은 좌절과 절망,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그 큰 부끄러움은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나의 동료들, 동아일보뿐 아니라 다른 언론사 기자들 상당수도 공유한 시대의 부끄러움, 아픔이었다.
1971년 3월 동아일보 앞에서 있었던 언론화형식, 1973년 가을 모교 농성장 바리케이드 앞 팻말에 쓰인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이 두 개의 사건, 그때의 참담함과 부끄러움은 이후 자유언론을 향한 저항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세월3] 동아투위 막내인 사연
입사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입사 동기 한 명(사진기자)이 갑자기 해직되었다. ‘근무 태도가 불량’하다는 게 해직 사유였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나와 동기 강정문(1975년 봄 해임 뒤 광고 쪽으로 가서 대홍기획 사장 역임. 한겨레 창간 준비 때 나온 명카피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가 그의 작품. 1999년 작고)이 분기탱천하여 함께 ‘연판장’을 썼고, 동기들 서명을 받아 김상만 사장실에 전달했다.
김상만 사장은 무진장 화를 냈다. 연판장 내용은 읽어보지도 않고, 감히 사장님한테 연판장을 전하는 그 ‘맹랑한 행태’에 그는 분노했다. 이제 갓 입사한 새파란 녀석들이 대학에서 데모하던 그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감히…. 결국 강정문과 나는 징계를 받았다. 김상만 사장은 그때 하도 화가 나서 우리가 동아일보에서 쫓겨날 때까지 수습기자·피디를 뽑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와 내 동기들은 동아일보 있을 때나, 쫓겨난 이후에나 늘 끝자리였다. 지금부터 50년 전 10월24일, 우리가 함께 높이 들어 올렸던 그 찬연한 횃불, ‘자유언론 실천선언’ 때도 나는 그 거룩한 싸움의 맨 뒷줄에 서 있던 막내였다.
그런데 이날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이전에 있었던 몇 차례의 ‘언론자유 선언’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실천’의 의미가 가장 강조되었고, 이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그날 발표된 실천 선언 내용과 자유언론 투쟁의 결의를 그날 자 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우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제작 거부에 들어간다는 결연한 의지도 밝혔다.
그 뜻이 반영되지 않자 마침내 우리는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유신독재의 공포 시대, 제작 거부라는 첫 단체행동에 들어갔던 때의 그 떨림과 감동, 그리고 일상으로 나를 지배했던 부끄러움과 무기력감, 분노와 절망을 순식간에 뛰어넘게 만든 해방감이 나를 압도하였다. 제작 거부로 신문이 발간되지 못하자 시민들의 격려 전화가 빗발쳤다. 50년 전, 10·24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월4] 눈발 흩날리던 만경 들판에서 만난 아내
1973년 12월1일, 동아일보 호남기동취재반이 서울을 떠났다.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경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 보니 8면 신문 제작에도 자주 기사 부족으로 허덕였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지역 기사를 적극 발굴하자, 본사 기동취재반이 지방을 돌면서 집중 취재를 하여 지역 기사를 제대로 다루자는 게 취지였다.
나는 호남기동취재반 3진 막내로 참가했다. 그 호남기동취재반의 마지막 취재 날인 12월19일, 나는 전북 김제·만경 일대에서 ‘마당 흉년’(실제 수확을 해보니 예상 작황을 크게 밑도는 흉년. 농업통계의 허위를 지적하기 위한 취재였다)을 취재하기 위해 각 면사무소를 찾아가 그해 상부에 보고된 예상 작황과 실제 작황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제법 굵은 눈발이 흩뿌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한 차량 앞좌석에는 나, 뒷좌석에는 전주 주재기자가 타고 있었다. 마지막 면사무소 취재 한 군데가 남아 있었다. 저만치 한 여인이 눈을 맞으며 우리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뒷좌석 전주 주재기자가 차를 세웠고,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만경고 영어교사였던 그녀와 나는 눈발 흩어지는 만경 들판에서 그렇게 만났다. 이듬해 6월 결혼했다.
결혼 넉 달 뒤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있었고, 이듬해 3월17일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닷새 뒤 우리의 첫아들 영빈이 태어났다. 쫓겨나기 직전 2층 공무국에서 닷새 동안 단식을 했다고 하여 아이의 별명이 한때 ‘단식이’가 되기도 했다.
해직 이후, 특히나 1978년 가을 나를 비롯 열 명의 동지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1년여를 감옥에서 보내던 시절 동안, 그리고 1980년 서울의 봄, 5월 광주항쟁으로 피의 역사가 휘몰아치던 그 즈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엮어져 호되게 수배당하던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내도 참 힘든 세월을 보냈다. 힘들 때면 때로 한탄했다. “그날 눈발 흩어지던 만경 들판을 걷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갔어야 했는데, 눈발이 흩어지자 마냥 들길을 거닐다 버스를 놓치고 지나가던 우리차를 택시인 줄 알고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운명이었다. 그 운명 속에서 특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일은 나의 수배 기간 중 경찰에 잡혀가 남편 있는 곳을 대라며 1주일 동안 경찰서 지하실에서 폭력과 욕설과 모욕에 시달렸을 때였다. 아내가 잡혀간 사실은 알았으나 거기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한참 뒤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악마였다. 아내를 잡아다 취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칠순의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수배 중인 내게 전해졌다. 내 생애에서 가장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아무 생각도, 아무런 판단도 할 수가 없었던 그 1주일…. 놈들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엮어 놓았기에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까지 그렇게도 모질게 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악의 보편적 행태였을 게다. 잡아다 두들겨 패고, 고문하고, 조작하고. 사법살인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의 보편적 행태…. 박정희 때, 전두환 때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었던 공포정치의 수단(지금은 마구잡이로 자행되는 압수수색, 법 기술로 일방적 정치행위를 하는 정치검찰이 이들의 후예인 셈).
내 수배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이듬해 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매듭지어지고, 전두환이 대통령 취임하고 나서, 무작정 귀가했다가 잡혀가 한 달 조사를 받을 때 알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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