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민을 위한 변명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유튜브 폭로’가 정국을 뒤흔들었다. 청와대가 KTG의 사장 인사에 개입하고, 기획재정부에 4조원대 적자 국채를 발행하라고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이다. 정부는 즉각 신 전 사무관의 폭로 내용을 부인하고, 공무상 비밀누설 등 혐의로 그를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쟁점은 신 전 사무관이 신분보호를 받는 ‘공익신고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공익신고자는 직무상 비밀준수의무를 위반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만 신 전 사무관이 현행법상 공익신고자에 해당할 가능성은 낮다. 우선 현행법상 공익제보의 신고자를 보
우리가 같은 영화를 보았습니까
바닥으로 촤악, 물이 쏟아진다. 연이어 들리는 규칙적인 비질 소리. 청소하는 게 분명한 소리가 반복되는 동안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가 손바닥만 한 하늘을 만든다. 그 위로 손톱 크기의 비행기가 고요하게 지나간다. 영화 로마의 첫 5분은 그 자체로 너무 강렬해서 나는 영화가 시작되고도 한동안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사람 그림자조차 등장시키지 않고 관객의 넋을 빼앗는다. 흑백이 이토록 풍부하게 화려할 수도 있다는 시각적 충격은 덤이다. 가난은 바쁘다. 그 분주함에는 주도권이 없다. 입주 가정부 클레오는 아이들과…
‘포스트-뉴스’ 시대의 언론 혁신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이맘때면 뭔가 희망 섞인 덕담을 나눈다. 당연히 이 칼럼에서도 한국 언론의 밝은 미래에 대한 얘길 하고 싶다. 하지만 장밋빛 얘기가 쉽게 나오질 않는다. 언론을 둘러싼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하기 때문이다. 경영과 영향력 측면 모두 큰 희망을 얘기하기 힘든 상황이다.이런 상황에서 한국 언론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언론과 저널리즘은 정말 위기 상황인 걸까? 이 질문에 대해 하버드대학이 운영하는 니먼저널리즘랩은 “죽
2018년 한국 외교, 성과와 과제
2018년, 한 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안보 정세를 구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초대형 외교 일정이 잇따라 진행됐다. 대한민국 외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남북 관계를 개선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 체제 구축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 것은 큰 성과다. 비무장 지대에서 남과 북의 군인들이 지뢰 제거 작업이나 상호 검증을 진행하는 모습은 남과 북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 공존을 이뤄낼 수 있음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감격적인 장면이다. 두 번째,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북핵 문제
삼성이 계속 대한민국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상장 유지 결정은 ‘제2의 국민연금 사태’다.”한국거래소가 10일 거액의 고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삼바에 대해 상장 유지 및 거래 재개 결정을 내린 직후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법과 상식에 어긋난다”면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국민연금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의 불공정합병에 부당하게 찬성함으로써 국민 노후자금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자초해 공분을 산 바 있다.한국거래소의 결정은 불과 한 달 전 삼바가 4조5000억원대 고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는 금융위원회의 발표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분식회계는 회계투명성
케인스와 슘페터가 손을 잡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예언한 칼 마르크스가 죽은 1883년 바로 그해 현대 자본주의의 중흥을 이끈 두 경제학자가 탄생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케인스주의’의 태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는 1883년 같은 해 태어나 동시대를 살았다.케인스는 ‘유효 수요’의 부족이란 개념으로 공황을 진단하고, 수요 진작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1971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밝힐 정도로 케인스 이론은 당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본주
당신이 쓰는 부사(副詞)는 안녕한가
마흔 살에 난생 처음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날마다 불을 뿜는 상사나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말단 직원이나 검진복을 입으면 순한 양 같다. 그 틈에 앉아 40년 만에 들여다볼 창자 속을 상상했다. 자못 불안했다. 이달 초 부사(副詞) 추적 조사를 의뢰할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질병에는 대체로 징후가 있다. 언어 생활도 마찬가지다. 번성하는 말과 쇠락하는 말이 그 사회를 가늠해준다. 어떤 부사를 점점 더 쓰고 어떤 부사를 덜 쓰는지 파악하면서 대중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김한샘 연세대 교수가 1950년대부터 올해까지 신문기사(말뭉치
특별재판부, 세월호는 되고 양승태는 안 되나
‘특별재판부’ 신설 얘기가 무성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 등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권부와 거래, 일선 재판에 개입했다는 ‘사법농단’ 기소사건을 담당할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이다. 서울중앙지법 부패사건 담당 재판부 상당수가 의혹에 연루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인 이상, 대상 사건 관련자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재판부가 재판을 하는 경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보면 특별재판부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설치된다. 판사 여럿과 영장전담법관으로 구성되는데
영화 ‘미쓰백’과 ‘살아남은 아이’
처음에는 그저 장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앳된 얼굴의 여자가 검지손가락으로 연신 꼬맹이의 이마를 밀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보니 “이 바보새끼가” “멍청아” 따위 말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아이는 서너 살쯤이나 됐을까. 저 상황에 개입해야 할까, 혹은 개입해도 될까…. 고민하던 사이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다. 여자는 아이가 메고 있던 어린이집 가방을 거칠게 낚아채 길 위로 던지듯 아이를 하차시켰다. 나처럼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낮게 혀를 찼다. 버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머뭇거렸던 기억은 죄책감이 되어 오래 마음
악시오스의 ‘똑똑한 간결함’서 배운다
“미디어는 붕괴됐다. 너무도 자주, 속이려 든다.”미디어 비평가의 주장이 아니다. 한 신생 언론사 출범 선언문에 담긴 말이다. 이 선언문엔 “독자들은 정보 홍수 속에서 허덕인다. 가치 있는 뉴스 찾기가 갈수록 힘들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독자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장담한다. 그 방법 중 하나로 ‘똑똑한 간결함(smart brevity)’을 내세웠다. 이런 당돌한 선언을 한 곳은 지난 해 1월 출범한 미국 뉴스 사이트 악시오스(Axios)다. 악시오스란 그리스어로 ‘가치 있는 것’이란 뜻이다. 폴리티코 창업자인 짐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