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도 '그들(They·제3의 성)'은 있었다
나를 군주(Lord)라 부르지 말고, 숙녀(Lady)라고 불러 다오.고대 로마제국의 제23대 황제 엘라가발루스(204~222)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기 218년에 집권해 222년 암살당하기 전까지 짧은 기간 황제로 집권했던 엘라가발루스는 현존하는 다양한 기록물에서 자신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남성 노예와 결혼한 뒤 아내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대 한 의사에게 여성의 질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고도 한다. 엘라가발루스를 형상화한 조각상과 그의 모습을 담은 동전엔…
아이의 달리기가 어른의 기부가 되는 날
2021년 12월 한겨레신문 지면에 아이의 달리기가 기부가 될 때라는 스포츠 칼럼을 썼었다. 미국에 잠시 머물 동안 아이들 초등학교에서 있던 기부 관련 행사를 소개한 글이었다.펀 런(Fun Run)으로 명명된 이 행사는 학년별로 작은 운동장을 다 함께 달리는데 아이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부모가 1달러씩 기부하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정해진 바퀴 수를 모두 채우면 지역 기업 등에서 기부 받은 작은 선물을 받았다. 최대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운동장 35바퀴였으니까 부모의 기부액도 아이 한 명 당 35달러가 최고였다. 아이 건강을 위한…
키신저와 미국 외교
1969년, 작은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하버드대 교수 헨리 키신저가 미국 닉슨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등장했다. 이후 그의 손을 거친 미국의 대외 정책들은 사실상 지금의 국제 질서를 만들어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종전 협상을 마무리했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이끌어냈다. 중국과 불편한 사이였던 소련은 중국과 미국이 관계 개선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미중 관계에서 자극받은 소련은 미국과 데탕트라고 불리는 관계 개선에 돌입했고 냉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중국을 움직여 미중소 3국
'질문하는 법'이 중요해진 AI시대 저널리즘
인공지능과 데이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통해 인류가 살아온 세상을 학습하고 인간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데이터를 활용해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인공지능과의 첫 만남은 묘한 설렘과 긴장감을 가져왔다. 저널리즘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면서 오히려 일자리를 빼앗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함께 들었다.실제로 챗GPT에게 고위공직자 데이터를 던져주고 농지를 가장 많이 가진 상위 10명을 뽑아달라고 하니 데이터 정제부터 분석까지 막힘없이 결과를 내놓았다. 직접 분석해 봐도 결과는 똑같
정말 필요한 노동시간 유연화는 따로 있다
윤석열 정부는 특별한 제도를 쓰지 않으면 주 52시간 넘게 일을 시킬 수 없던 것을, 월분기(3개월)반기(6개월)1년 단위로 주 평균 52시간 이내이면 되도록 노동시간 제도를 개편하겠다고 했었다. 이러면 어떤 주에는 52시간 넘게 일을 시켜도 불법이 아니다. 과로 논란이 일자 정부는 한 번 근무하면 11시간은 무조건 쉬게 하겠다고 했다. 이때 하루 최장 노동시간은 24시간에서 11시간을 뺀 13시간이다. 여기에 4시간마다 30분씩 휴게시간을 줘야 하는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면, 주 6일 근무시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장 노동시간은 69시간
'유아차 논쟁'이라는 징후
남초 커뮤니티의 생떼가 이번엔 유아차라는 단어로 옮겨붙었다. 한 유튜브 채널 출연진이 유모차라 말한 것을 성중립 단어인 유아차라 자막을 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남초 커뮤니티 누리꾼은 과한 페미니즘 검열이라며 영상에 악플을 퍼붓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조롱 섞인 문의 글을 도배했다. 2년 전 GS25 포스터 그림이 한국 남성을 모욕한다며 사과문을 받아낸 것과 꼭 같은 양상이다.일찌감치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된 유럽과 미국도 겪은 일이다. 영국인 작가 로라 베이츠는 어린 남학생들이 어느 날부터 똑같은 단어와 날조된 근거를 인용하며 여성
4대강 보 오염수와 '녹조의 번성'
우리 사회는 10년이 넘게 녹조의 원인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잘못된 주장을 되뇌는 일부 전문가 탓이다.30여년 동안 국내 한 일간지에서 환경전문기자로 활동하다 은퇴한 선배 기자가 최근 펴낸 녹조의 번성-남세균 탓인가, 사람 잘못인가(이하 녹조의 번성)의 들어가는 말 중 일부분이다. 이 선배 기자가 오랫동안 써온 녹조에 대한 글들이 담긴 이 책의 제목에 대해 남세균 탓이라고 답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저 오랫동안 강물에 존재해 왔을 뿐인 남세균이 대량 번식할 수 있는 조건을 국내…
삼성전자의 '현금 100조원'
지난 10월5일 경남 의령군을 찾았다. 이곳은 황금 들판의 벼 이삭들이 가을바람에 일렁였다. 의령군 한복판에 삼성 이병철 창업 회장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천석지기 부농인 부친에게서 300석의 쌀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의령 쌀이 삼성그룹의 종잣돈이 됐다.이 회장은 실패를 여러 번 경험했다. 1937년 중일 전쟁,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사업을 접었다. 그는 이어진 실패에도 부친과 주변의 도움 덕분에 재기에 성공했다. 만석지기천석지기 가문 출신은 많았다. 하지만 그처럼 산업 흐름을 꿰뚫고 과감한 투자
수장고에서 찾은 새 유물
올해 봄, 충남 국립부여박물관 수장고에서 유물을 살펴보던 한 학예연구사의 눈이 반짝였다. 2020년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1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물 측면에 거꾸로 뒤집힌 U자 흔적이 보였다. 막대 같은 손잡이가 붙어 있다 떨어져 나간 자리였다. 손잡이가 있었다면 무언가를 담기 위한 물건이었을 터. 발굴된 뒤 수장고에 보관되는 내내 엎어진 그릇처럼, 위아래가 정해져 있던 이 유물을 뒤집어본 순간 학예연구사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비록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지만, 그 생김새가 손잡이 향로와 일치했다. 그동안 토기 받침
공정성 시대의 병역 혜택
우하람은 한국 다이빙 일인자다. 도쿄올림픽 때는 한국 선수 역대 최고 성적(4위)을 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항저우 대회까지 10개 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다이빙 최강 중국의 벽에 막혀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병역 혜택 대상자가 아니다.예술체육인에 대한 병역특례제도는 1973년 박정희 정부 때 만들어졌다. 한국, KOREA라는 이름이 낯선 때 국위 선양을 바라는 의도에서였다. 정명훈(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이나 양정모(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한국 최초 금메달) 등이 제도의 혜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