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와 데이터
건축 및 토목 노동자를 의미하는 일본어 도카타(土方, ドカタ)가 어원인 ‘노가다’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을 뜻하는 ‘막일’의 속어다. 데이터(data)는 사전적으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문자, 숫자, 소리, 그림 등의 형태로 된 정보를 말한다. 노가다와 데이터, 각각의 의미만 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지난 2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데이터저널리즘코리아 컨퍼런스’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자주 등장했다. 특히 데이터 저널리즘 보도 사례 위주 발표였던 3부에서 더욱 그러했다. 네 명의 3부 발표
새로운 시대의 칼, ‘조회수’와 펜의 싸움
얼마 전 방영된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악플과 이를 조장하는 인터넷 뉴스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무차별적인 ‘실검 기사’나 클릭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낚시성 기사 생산, 이로 인한 악플 등은 이미 위험 수위를 한참 넘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지만, 지금 우리는 조회수라는 새로운 시대의 칼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까지 스코어는 암울하게도, 조회수가 압도적 우세다. ‘기레기’라고 멸칭하며 개인의 열악한 윤리 의식을 규탄하기는 쉽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뉴스 생태계의 문제점이 은폐된다. 광고가 뉴
‘기레기’라는 문제
기자들이 하도 ‘기레기’로 지탄을 받으니 이젠 그 말이 그리 신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기자들은 볼멘소리를 내고 싶어도 대놓고 어디에 쓰거나 말하지는 않아왔다. 내심 언론이 지은 죄를 알기에 대꾸하지 않거나 혹은 ‘저들은 반대편이야’ 하면서 자기들끼리 독자들을 욕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샌 “기자들 모두를 기레기 취급하면 오히려 좋은 기사를 쓰려는 이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며 반격하는 기자들이 보인다. 최문선 한국일보 기자의 지난달 칼럼 같은 게 그런 예다. 미디어 수용자들 사이에서도 기자들에 대한 그런 무차별 공격보다는 핵심을…
조금 떨어져서 봐야 할 국가, 북한
초등학생 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아주 가벼운 사고인데도 어머니는 깜짝 놀라 사고현장까지 울며 달려왔다. 가까운 것이 먼 것보다 크게 보이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폭행사건에는 수많은 국민이 분노하지만,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대형 살상극에는 무덤덤하다. 문제는 이 거리감의 본성이 이성적인 판단을 흐린다는 데 있다. 우리는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과민반응한다. 북한을 ‘같은 민족’이라 생각해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언론은 북한의 모든 행동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 아무리 남북의 평화와 비핵화, 경제협력이 중요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 재설정해야
저널리즘학자 월터 기버는 1961년 가을에 발표한 논문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 시청 출입처 사례연구에서 세 가지 가설적 모형으로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설명한다. 먼저, 독립적 관계 모델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기자와 취재원은 상이한 사회체제의 구성원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둘은 조직이 개인에게 부여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인식이 달라 뉴스 가치에 대해 갈등적 견해를 보일 수 있으며, 어느 일방이 뉴스가치에 만족하지 못할 때에만 피드백이 발생하므로 둘 사이에는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만이 존재한다. 둘째, 상호의존적 관계 모델이다
암묵적 편견
최근 구글의 연구진들은 ‘다음에 볼 영상을 추천하기(Recommending what video to watch next)’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유튜브에서 특정 영상을 다 보면 자동 재생되는 다음 동영상의 추천 알고리즘을 좀 더 이용자 맞춤형으로 개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구진들은 추천 알고리즘의 개선 과정에서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 문제를 특별히 다루고 있다. 암묵적 편견은 심리학 용어로 본인은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편향적 태도를 말한다. 이 논문에서
논란 아닌 논란은 그만
2009년 걸그룹으로 데뷔했을 때 세상이 떠들썩했다. 설렌다는 뜻의 ‘설리설리하다’라는 신조어가 널리 쓰일 정도였다. 한편, 걸그룹에 요구되는 강도 높은 감정노동과 꾸밈 억압에서 벗어난 설리는 다른 의미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어느 쪽이든 설리에게 가혹했을 것이다. 14일 설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에도 속도전에 급급하여 보도 권고 기준을 무시한 기사가 쏟아졌다. 하려는 이야기는 다른 주제지만, 해당 사건에서 깊은 우울감이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증상을 느끼는 분은 이 글을 건너뛰길 바란다. 툭하면 논란의 중심이 됐지만
다른 목소리
나라가 둘로 갈리는 건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로 합쳐지는 것보다는 낫다.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 한몸처럼 팔다리를 휘두르는 군인들, 국가주석의 말에 로봇병정처럼 구호로 응답하는 인민해방군의 모습에 서늘한 느낌을 받은 건 ‘하나가 된 전체’가 얼마나 위압적이고 무서운지 알기 때문이다.“술자리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얘기 꺼내면 싸움 난다”고 하면서 다들 그 이야기를 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선 글 안 올리려고 했지만”이라는 서두를 달며 글을 올린다. 서초동에 100만, 200만 명이 모였다고 하더니…
독자가 싫어하는 말을 전해야 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품 생산자의 모든 초점은 고객 만족과 고객 창출에 맞춰진다. 미디어(Media)는 상품 측면에선 이 기조와 맞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가끔 고객 요구와 엇나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은 민주주의 창출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지만, 과거 정치권과의 결탁, 대기업 광고주와의 결합 등 떳떳하지 못한 길도 걸어왔다. 고객으로서의 독자는 늘 뒷전으로 밀렸다. 지금까지 독자는 정보가 없었고, 속도도, 입도 없었다. 그런데 스마트한 지금의 독자는 이 모든 걸 가졌다. 미디어가 정보와 견해를 제시하면, 이를 그대로 수용했
학벌과 언론·재벌, 어느 세습이 더 나쁜가
고려 시대의 음서는 관직을 세습하는 제도였지만, 온전한 세습은 아니었다. 음서로 얻는 것은 하급 관료가 고작이었기에 능력이 부족하면 한직을 떠돌다 물러나야 했다. 고려 시대 권력 세습의 진짜 핵심은 수조권을 세습할 수 있는 공음전이었다. 대죄를 짓지 않는 이상 수조권을 빼앗기지 않았기에, 유서 깊은 명문 가문은 끊임없이 부를 불려 나갈 수 있었다.조국 법무부 장관 부부는 딸에게 명문학교 출신이라는 학벌과 의사라는 상류층 지위를 물려주려 했다. 인맥으로 의학 논문의 제1저자를 만들어주고, 대학 총장 표창장을 안겼다. 일반 시민이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