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의 꼴값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우선 밝히면, 나는 ‘KBS에 2500원 내기 싫다’던 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의 시각(2020년 8월12일자 조선일보 태평로)에 동의하진 않는다. 수신료를 더 내서 깊이 있는 탐사보도물과 양질의 다큐멘터리를 언제든 무료로 쉽게 볼 수 있다면 간장 두 종지, 아니 자장면 두 그릇값 정도는 기꺼이 낼 생각이 있다. 수신료가 신문 월 구독료만큼 오르더라도 KBS가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외주사 쥐어짜기 행태를 말끔히 개선할 수 있다면 다른 지출을 줄이는 데도 불만이 없다. 수신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공영방송 서비
'좌파에서 극우까지' 10년 간의 특별한 경험
브라질의 연말연시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과 상파울루의 아베니다 파울리스타 거리에서 어김없이 새해를 알리는 축포가 터졌지만, 관객은 거의 없었고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해마다 200만~300만명의 인파가 몰리던 행사라는 사실이 낯설 정도였다.2020년을 보낸 브라질 사회는 코로나19 충격 못지 않게 지난 10년간의 정치적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 좌파로 시작해 극우로 이어지는 특별한 경험이다.2002년 대선에서 노동운동가 출신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승리하며 좌파정권 시대를 열었다.…
'아체 공개 태형' 기사가 말하지 않는 것
예컨대 이런 전개다. ‘OO혐의로 OO대 공개 태형→이슬람 관습법(샤리아) 지배→국제 인권단체 비난’ 제목은 ‘이유는’인데 정작 내용은 헐겁다. 외신을 옮기거나 현지 매체를 번역한 통신 기사를 베껴 쓴 수준이라 그렇다. OO은 달라지지만 독자들 반응은 대개 빼쏘았다. ‘미개한 무슬림’. 인도네시아 서북단의 아체특별자치주(州)의 공개 태형 기사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스테레오타입이다. 필자 역시 특파원 부임 후 두어 개 썼다. 왜? 읽히니까.이런 의문이 들었다.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습과 전통을 차 떼고 포 떼고 우리 잣대
감탄고토(甘呑苦吐)
중국의 젊은 기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미·중 갈등으로 옮아갔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기능하는 동안 미국도 큰 이익을 봤는데 중국의 국력이 조금 세졌다고 짓밟으려 하는 건 온당치 않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대국은 대국답게 대접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와중에도 은연중 자신감이 묻어났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의 쓰임새가 줄어들고 오히려 위협이 되니 공세로 돌변했다는 의미로 읽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 전후의 한·중 관계와 비슷하지 않냐고 물었다. 좌중이 한
만약 다른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혼란과 갈등의 한 달이 지났다. 지난달 3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야말로 200여년 미국 역사에서 전례 없는 선거였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역대 최대 인원이 우편투표에 참여했고, 덕분에 나흘이 지나서야 당선인이 확정됐다. 지난 100여년 이내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인 선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이 선거결과에 불복, 선거부정을 주장하며 소송까지 제기한 것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전부터 조 바이든 당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평화의 소녀상 베를린 정착기
지난 10월 초 베를린 미테구(Bezirk Mitte)에서 재독한인들의 화를 돋우는 일이 일어났다. 미테지방청이 민간단체인 코리아협의회의 주관으로 설치된 소녀상과 비문을 10월 중순까지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해당 소녀상과 비문이 정치적·역사적인 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무겁고 복잡한 갈등이 담긴 사안이므로 독일에서 이를 규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판단의 이유였다. 애당초 소녀상과 비문은 전쟁 중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반대하기 위한 상징으로서 설치허가를 받았었다. 설치 당시 일본 정부는 지역 내 의원뿐만…
스가가 또 화났다
10월27일 아침, 일본 공영방송 NHK의 하라 세이키 정치부장석 전화가 울렸다. 야마다 마키코 총리관저 내각 공보관이었다. 우리로 따지면 청와대 홍보수석쯤 된다. 야마다는 “총리, 지금 무척 화났어요. 그렇게 파고들다니 사전 협의와는 다르잖아요. 뭐라 말 좀 해 봐요”라며 따지듯 물었다.전날,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취임 이후 처음 열린 국회에 나가 ‘소신표명 연설’을 했다. 집권 청사진을 밝히는 자리였다. 그리곤 곧바로 NHK 저녁 프로그램 ‘뉴스워치9’에 생방송 출연했다. 연설 내용을 재차 홍보할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이
핀란드 언론이 '질투의 날'에 분노한 이유
해마다 11월1일 찾아오는 ‘질투의 날’에 핀란드 언론이 분노했다. 중대한 이유가 있다. 이곳 언론은 일제히 전년도 고액 납세자 명단을 기사로 쓴다. 기자들은 국세청이 편의상 제공한 연 소득 10만 유로(한화 1억3000만원) 이상 명단을 토대로 주요 고소득자 면면을 소개하고 그 배경도 분석한다. 게임 클래시오브클랜과 브롤스타즈를 만든 슈퍼셀(Supercell) 창업자 일카 파나넨을 비롯한 게임 업계 CEO, 스포츠계와 연예계 스타, 또 여러 사업가가 주로 순위권에 오른다. 돈 많이 번 사람 명단을 보고 질투심 솟는 날이란 별명이…
보건보다 정치… 초점 빗나간 '백신 전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세계 3위, 누적 사망자 세계 2위(2020년 10월 말 현재)인 브라질에서 ‘백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상파울루 주지사를 비롯한 지방정부 수장들이 백신 확보 방법과 접종 방식을 두고 기싸움을 계속하면서 코로나19 방역에 혼선을 더하고 있다. 문제는 ‘백신 전쟁’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우선하는 공공보건의 관점이 아니라 정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브라질에서는 상파울루주 정부와 중국 시노백(Sinovac·科興中維) 생물유한공사가 추진하
인도네시아 정치의 '아빠·엄마·장인 찬스'
다음달 9일 인도네시아는 지방선거를 치른다. 지역은 270곳, 유권자는 1억600여만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한 차례 미뤘고 여전히 연기하자는 여론이 있으나 한국 4·15 총선의 성공 비결을 전수받는 등 만전을 기하고 있다.중앙 정치인들 이름마저 낯선 인도네시아의 이번 지방선거에서 긴 이름 두 개를 주목해야 한다.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의 맏아들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기브란)와 사위 무함마드 보비 아리프 나수티온(보비)이다. 둘은 각각 33세, 29세 사업가로 정치 경력이 전무한데도 쟁쟁한 경쟁자